“구미세무서 안동세무서 동대구세무서를 거치며 실물경제의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현대증권 사장 때는 자본시장의 일선에서 뛰었습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한국 자본시장의 부활을 위해 제 모든 것을 쏟을 생각입니다.”

한국거래소 제공
한국거래소 제공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했다. 2월 말인데도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군청색 내복이 힐끗 비쳤다. 한국거래소 비서실에서는 “이사장이 링거를 맞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하루 13시간 이상 일정을 소화한다”고 귀띔했다.

타고난 강골인지 모르지만 감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64)에게서 아픈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오는 음식마다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통문어 수육을 가위로 성큼성큼 잘라 내주고, 나무젓가락으로도 잡기 힘든 홍해삼을 쇠젓가락을 쓰면서도 한 번 흘리는 법이 없었다. 아프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 ‘꼼꼼하다’는 그를 둘러싼 평이 절로 떠올랐다.

인생을 바꾼 한마디

한때 ‘신의 직장’으로 불렸던 한국거래소 직원 중에는 요즘 “입에서 단내가 난다”고 푸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작년 9월 최 이사장이 취임한 이후 당연하다고 여기던 ‘저녁이 있는 삶’은 물론 주말마저 반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업무에서 최 이사장은 “양복바지의 칼 주름처럼 ‘날’을 바짝 세운다”는 평가를 듣는다. 스스로 평은 어떨까. “독하게 일을 하지만 일상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달청장으로 공직을 마치는가 싶었는데 현대증권 사장을 거쳐 다시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에 앉은 것은 이런 ‘소탈한 성격’과 ‘추진력’을 겸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일은 소주처럼 독하게…함께 고민하면 해법 보이죠"
최 이사장이 선택한 맛집은 부산 구시가지인 중앙동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생선요리 전문점 ‘어촌’이다. 인근 해운회사 직원이나 오랜만에 항구에 들른 마도로스들이 회식 장소로 자주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큰 대접에 돌도다리와 함께 담긴 참가자미회를 한 점 입에 넣고 “음 맛있네”를 연발하던 최 이사장이 테이블에 깔린 부산 소주병 주둥이를 만지작거렸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소주에는 특별한 추억이 담겨 있다”며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경북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한 최 이사장은 교수 지망생이었다. 인생 행로가 바뀐 것은 2학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친구에게 막걸리 한잔 하자고 했더니 ‘나 바쁘다. 너희하고는 부류가 다르다’며 휙 돌아서 가버리더군요”. 그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무시당한 게 억울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그럼 공부로 승부해보자”고 결심했다. 아침 일찍 학교 도서관에 나가 끼니 때를 빼고는 밤 11시까지 책과 씨름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 위로로 삼은 게 소주였다며 껄껄 웃었다. “힘든 하루를 도서관에서 마치고 돌아와 한 병씩 먹고 ‘콱’ 자버리니까 스트레스도 풀고 좋습디다.”

현장에서, 밑바닥부터

소주와의 인연은 또 있었다. 1999년 1월 미국 시러큐스대에서 연수를 받던 그는 재정경제부 재산소비세심의관(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소주 분쟁’ 때였다. 당시 유럽연합(EU)과 미국은 소주와 위스키가 같은 증류주인데 소주 세율은 35%이고 위스키는 100%인 게 불합리하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술 가격에 세율을 곱하는 ‘종가세’ 체계를 갖고 있던 한국이 미국과 EU 요구를 받아들여 주류 도수에 세율을 곱하는 ‘종량제’를 도입하면 1병에 550원 하던 소줏값이 1만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는 기존 종가세 체계는 유지하되 세율은 위스키나 소주 모두 72%로 동일하게 하겠다는 ‘묘책’을 내놨다. “내가 없었으면 지금 소주도 없을 거예요. ‘소주 지킴이’입니다.”(웃음)

그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다는 평을 듣는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유지창 전 산업은행 총재, 신동규 전 농협금융지주 회장, 이용섭 민주당 의원 등 ‘쟁쟁한’ 동기들과 관료생활을 함께하면서 저절로 몸에 밴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일선 세무서를 돌다가 고교 선배인 서영택 전 국세청장의 추천으로 관료들이 선망하는 재무부 세제국으로 옮겨와 ‘죽도록 일할 때’의 추억도 생생하다고 했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없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에 ‘교육세법을 입안하라’는 지시가 갑자기 떨어졌습니다. 각종 간담회를 따라다니고 매일 혼자 밤을 새우며 차트를 만들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너지면 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는데 그럴수록 윗선의 인정도 두터워졌죠.”

36세 때 내려간 국세청 안동세무서 시절도 ‘현장에서, 밑바닥부터’라는 그의 신조가 효과를 발휘한 때로 기억에 남아 있다. 처음에는 안동생활이 잘 풀리는 줄 알았다. “양반 동네인 안동에 가니 지방 유지들이 ‘서장은 본(本)이 어덴교’라고 묻더군요. 법산 최씨로 백부께서 성주에서 향교 장을 하셨다고 답했죠. ‘서장은 양반이구먼’ 한마디가 나온 뒤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동댐과 임하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지역에서 지뢰밭처럼 문제가 터졌다. 수몰지역에 각종 세금이 매겨졌다며 지역 민심이 흉흉해졌다. “수몰지역마다 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가서는 매일 사랑방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이거는 이래서 이렇고, 앞으로 이리 됩니다’라고 세법을 설명해주고 납부 세금을 최소화하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지역 기관장이 지역민을 만나 직접 대책을 논의한 덕인지 전국 130개 세무서 실적 중 110위권 밖이던 안동세무서는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전국 5등을 기록한 우수 세무서가 됐다.

자본시장 활성화로 ‘유종의 미’

[한경과 맛있는 만남]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일은 소주처럼 독하게…함께 고민하면 해법 보이죠"
최 이사장은 자신의 관료 시절에 대해 “순탄했다”고 했지만 그의 관운(官運)이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재경부 세제실장과 중부지방국세청장을 지내고 차관급인 조달청장을 맡아 ‘나라장터’를 만들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영남 출신이란 이유 때문에 노무현 정부 시절 정치적인 오해를 받은 것이 발목을 잡은 듯하다고 했다. 관료의 길을 접고 대구 계명대에서 청년 시절의 꿈인 교수생활을 하던 2008년 뜻밖의 기회가 생겼다. 현대증권 사장 자리였다. 친한 지인이 “현대그룹에서 차관급 출신 공무원을 찾는다”고 소개했다.

공무원 시절 현장을 도맡아 경험했고 경제도 잘 안다고 자신했으나 민간 기업인 현대증권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강성 노조의 견제도 적지 않았다. 그는 “안전 위주에 중점을 두던 공무원과 달리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의 생리가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그를 포함해 13개 증권사 사장이 ‘주식워런트증권(ELW) 스캘퍼 편의 제공 의혹’으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올초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최 이사장은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증권업계를 이해하고 보수적인 공무원의 시각을 바꾼 4년의 시간이 값졌다”고 했다.

술 기운이 불콰하게 올라올 무렵 도다리쑥국이 들어와 모락모락 김을 피웠다. 화제가 한국거래소 현안으로 이어졌다. 거래소는 주식시장 불황에 따른 수익 감소로 고심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그의 좌우명처럼 “노력하면 길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공언에는 어느 누구보다 ‘현장’을 잘 안다는 자신감이 스며 있었다.

“구미세무서 안동세무서 동대구세무서를 거치며 실물경제의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현대증권 사장 때는 자본시장의 일선에서 뛰었습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한국 자본시장의 부활을 위해 제 모든 것을 쏟을 생각입니다.”

공무원 출신으로 민간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경쟁력을 갖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폼 재면서 지내거나 여러 부탁을 받아도 칼처럼 잘라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위법을 하라’ ‘권한을 남용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충분히 같이 고민하면 모두가 원만하게 풀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바닥에서, 민간에서, 높으신 관료를 모시면서 수많은 ‘을(乙)’들이 느꼈을 고충을 그는 잘 아는 듯했다. 3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칠 때쯤 최 이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몸살 기운을 몰아낸 것은 신선한 음식 때문일까, 바닥부터 거치면서 익힌 ‘하면 된다’는 열정 덕일까.

[한경과 맛있는 만남]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일은 소주처럼 독하게…함께 고민하면 해법 보이죠"

최경수 이사장의 단골집 부산 '어촌' 세로로 길게 썬 참가자미회 일품

어촌은 부산역에서 10분 거리인 중앙동 구시가지에 있는 생선요리 전문점이다. 어촌이 문을 연 것은 25년 전이다. 17년 전 지금 식당을 운영하는 이평자 사장이 인수했다. 대한항공, 부산국제여객터미널, 한진해운, KT 부산사옥 등이 인근에 있어 부산 직장인들의 회식장소로 인기가 많다.

진해에서 공수해온 참가자미를 ‘포항식’으로 세로로 길게 썬 참가자미회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돌문어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 내오는 문어숙회는 통통한 살이 쫄깃쫄깃하게 씹혀 소주 안주로 제격이다. 도다리를 쑥에 넣고 맑게 끓인 도다리쑥국을 먹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 전복버섯구이 생선회도 인기 메뉴다. 가을에는 전어, 겨울에는 생태탕 생대구탕 물메기탕을 맛볼 수 있다.

참가자미회 가격은 3~4인분(대)이 10만원이고 2~3인분(중)이 7만원이다. 1인당 3만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다리쑥국은 한 그릇에 1만5000원이다. 문어숙회 전복버섯구이는 시가다. 회를 주문하면 문어숙회는 한 접시에 3만원, 전복버섯구이는 한 접시에 5만원이다. 평일에만 문을 연다. (051)463-3660

부산=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