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동양 도자기를 똑같이 만들어라"…유럽왕실 특명내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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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34) 유럽도자기
1604년 암스테르담은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귀족들로 넘쳐났다. 이렇게 많은 나리들이 암스테르담에 납신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단 하나. 중국산 청화백자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이 엄청난 양의 중국자기를 싣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왕 앙리 4세, 영국 왕 제임스 1세 등 유럽의 제왕과 귀족들은 직접 혹은 대리인을 통해 한 점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표면이 반들반들한 청화백자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군주들이 탐내던 물건이었다. 특히 엄청난 고가라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점은 자신들의 우월감을 뽐내기에 제격이었다. 중국산 자기가 얼마나 값비싼 물건이었는지는 당시 네덜란드 정물화에 이것들이 자주 등장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빌럼 칼프가 그린 ‘명대 자기가 있는 정물’은 그런 작품 중 하나다. 그림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명대 청화백자 항아리는 당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베네치아산 유리컵과 함께 묘사돼 당시 네덜란드인의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증언한다.
제왕들은 중국산 자기를 수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이 신비한 그릇의 제조방법을 알아내 떼돈을 벌까 궁리했다. 메디치가를 비롯한 정치적 유력자들이 거금을 들여 도공을 고용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성공의 행운을 누렸다. 작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였다.
그가 도자기를 만들 궁리를 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스웨덴군에 자신의 지배 영역이었던 폴란드를 잃게 되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연금술사 뵈르거를 고용해 금을 만들게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자기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1709년 마침내 중국 자기와 똑같은 백자 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마이센 도자기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그 제조 비법은 도공들의 사욕 때문에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불과 반세기 뒤인 18세기 중반에는 유럽 전역에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중국 도자기가 퍼져나간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비단과 자기의 나라 ‘차이나’에 대한 오랜 문화적 동경, 그곳에 회교도를 물리칠 수 있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기독교 왕이 존재한다는 믿음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중국 취미를 낳았고 그것이 도자기 등 중국 물건에 대한 수집 열기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마이센의 뒤를 이어 유럽 도자기를 석권한 것은 왕실의 지원을 받은 세브르 도자기였다. 여기에는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의 재정적 후원과 신제품 개발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세브르는 물론 마이센 등 유럽도자기의 주요 거점에서 생산된 초기 도자기들은 중국의 청화백자를 흉내냈지만 점차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제품이 개발됐다.
그중 대표적인 게 왕립 세브르 공방에서 생산된 금채 자기였다. 퐁파두르 부인의 제안으로 도자기에 금을 붙여 구운 이 그릇은 유럽 도자기 산업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세브르 공방 도자기는 금채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표면을 장미색, 청색, 녹색 등 화려한 색으로 덮고 그 사이사이에 창 모양으로 공간을 비운 후 목가적 풍경이나 풍속화를 그려 넣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선발 주자인 마이센 자기는 왕실의 지원을 업은 세브르의 신제품 공세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후 유럽의 후발 주자들은 너도나도 세브르 자기를 벤치마킹해 오늘날과 같은 유럽 도자기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우리 가정에서도 한 벌쯤은 갖고 있는, 그릇 가장자리가 금박으로 장식된 찻잔과 식기 세트는 이 세브르 공방이 그 원조다.
유럽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는 차 마시기의 저변 확대가 한몫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이후 차 음용이 중산계급의 생활문화로 자리 잡았다. 특히 바깥 출입이 제한됐던 중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오후 5시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티 파티’가 유행했다. 영국에선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자리 잡았고 이것이 도자기 산업의 발달을 이끌었다. 특권층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한국이 오늘날 도자기 산업의 주도권을 유럽에 내준 건 우연이 아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표면이 반들반들한 청화백자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군주들이 탐내던 물건이었다. 특히 엄청난 고가라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점은 자신들의 우월감을 뽐내기에 제격이었다. 중국산 자기가 얼마나 값비싼 물건이었는지는 당시 네덜란드 정물화에 이것들이 자주 등장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빌럼 칼프가 그린 ‘명대 자기가 있는 정물’은 그런 작품 중 하나다. 그림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명대 청화백자 항아리는 당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베네치아산 유리컵과 함께 묘사돼 당시 네덜란드인의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증언한다.
제왕들은 중국산 자기를 수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이 신비한 그릇의 제조방법을 알아내 떼돈을 벌까 궁리했다. 메디치가를 비롯한 정치적 유력자들이 거금을 들여 도공을 고용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성공의 행운을 누렸다. 작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였다.
그가 도자기를 만들 궁리를 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스웨덴군에 자신의 지배 영역이었던 폴란드를 잃게 되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연금술사 뵈르거를 고용해 금을 만들게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자기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1709년 마침내 중국 자기와 똑같은 백자 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마이센 도자기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그 제조 비법은 도공들의 사욕 때문에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불과 반세기 뒤인 18세기 중반에는 유럽 전역에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중국 도자기가 퍼져나간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비단과 자기의 나라 ‘차이나’에 대한 오랜 문화적 동경, 그곳에 회교도를 물리칠 수 있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기독교 왕이 존재한다는 믿음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중국 취미를 낳았고 그것이 도자기 등 중국 물건에 대한 수집 열기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마이센의 뒤를 이어 유럽 도자기를 석권한 것은 왕실의 지원을 받은 세브르 도자기였다. 여기에는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의 재정적 후원과 신제품 개발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세브르는 물론 마이센 등 유럽도자기의 주요 거점에서 생산된 초기 도자기들은 중국의 청화백자를 흉내냈지만 점차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제품이 개발됐다.
그중 대표적인 게 왕립 세브르 공방에서 생산된 금채 자기였다. 퐁파두르 부인의 제안으로 도자기에 금을 붙여 구운 이 그릇은 유럽 도자기 산업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세브르 공방 도자기는 금채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표면을 장미색, 청색, 녹색 등 화려한 색으로 덮고 그 사이사이에 창 모양으로 공간을 비운 후 목가적 풍경이나 풍속화를 그려 넣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선발 주자인 마이센 자기는 왕실의 지원을 업은 세브르의 신제품 공세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후 유럽의 후발 주자들은 너도나도 세브르 자기를 벤치마킹해 오늘날과 같은 유럽 도자기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우리 가정에서도 한 벌쯤은 갖고 있는, 그릇 가장자리가 금박으로 장식된 찻잔과 식기 세트는 이 세브르 공방이 그 원조다.
유럽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는 차 마시기의 저변 확대가 한몫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이후 차 음용이 중산계급의 생활문화로 자리 잡았다. 특히 바깥 출입이 제한됐던 중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오후 5시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티 파티’가 유행했다. 영국에선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자리 잡았고 이것이 도자기 산업의 발달을 이끌었다. 특권층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한국이 오늘날 도자기 산업의 주도권을 유럽에 내준 건 우연이 아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