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탐정 역할 요구받는 한국 회계사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헬렌 켈러에게 글을 가르친 설리번 선생은 대단했다. 손가락을 이끌며 촉각으로 글자를 가르쳤고, 물체를 더듬어 형상을 인지시켰다. 처음 알려준 단어는 소녀가 안고 있던 인형(doll)이었다. 펌프질로 수돗물을 끌어올려 손에 부어주면서 물(water)이라는 단어도 가르쳤다.

촉각으로 직접 연결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이 문제였다. 사랑(love)이 무엇인지를 아이가 물어왔다. 설리번 선생은 아이와 함께 구름이 잔뜩 낀 바깥 뜰로 나왔다. 조금 있으니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쏟아져 따뜻해졌다. 한낮의 열기로 시들어진 풀을 만지게 했다. 소나기가 몰려와 비를 퍼붓자 생기를 되찾은 풀을 다시 만지게 했다. 아이는 햇살과 소나기를 통해 창조주의 사랑을 새기며 글자를 익혔다.

‘회계원리’는 상경계 신입생이 부딪히는 첫 허들이다. 초·중·고 교과과정에는 없던 과목이어서 건성건성 듣다가는 낙제하기 십상이다. 회계원리를 대충 통과해 회계문맹으로 남으면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이 사는지 죽는지, 나라 빚더미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 자산과 이에 대한 청구권의 변동을 기록하는 회계구조를 다루는 처음 몇 시간이 고비다. 그 고비를 잘 넘기면 부쩍 실력이 붙는다. 기업보다는 익숙한 가계와 국가재정 예를 통해 구조를 설명한다. 학기마다 수강생 반응이 다르고 설명이 잘 먹혀들지 않아 답답한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설리번 선생을 떠올리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고급 수준까지 마스터한 재원은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해 회계전문직의 길로 들어선다. 공인회계사는 회계보고를 감시하는 시장경제 파수꾼이다. 기업이 작성한 재무제표의 적정성을 독립적으로 검증해 감사의견을 표명한다. 외부감사는 기업의 내부통제조직이 제대로 작동되고 재무제표가 정상적으로 작성됐다는 전제 아래 수행한다. 내부공모에 의해 회계기록이 날조된 사기 케이스를 외부감사에서 모두 잡아낼 수는 없다. 압수수색 같은 강제적 절차는 민간인 신분인 공인회계사에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는 회계부정을 주도한 책임자뿐만 아니라 가담자까지 가혹할 정도로 처벌한다. 엔론 회계부정을 주도한 하버드 MBA 출신 최고경영자 제프 스킬링은 2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한국의 솜방망이 처벌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부하 직원에게 회계부정을 지시하면 내부고발로 귀착될 확률이 높다. 회계부정에 대한 책임이 엄중해야 회계기록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공인회계사 외부감사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한다.

코스닥에서 상장폐지된 포휴먼 투자자가 제기한 삼일회계법인 상대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작년 11월 1심 판결은 외부감사의 근간을 흔드는 쇼크였다. 수출채권 확인을 위해 일본 현지를 방문한 감사인이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수준의 정교한 사기극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가짜 채권을 확인하지 못한 책임으로 140억원의 손해배상을 선고받았다. 삼일회계법인은 국내 최대 회계법인으로 국제적 선두주자인 PwC의 한국 파트너다. 내부심리에 의한 품질관리로 평판이 높다. 내부자가 공모한 사기성 회계부정까지 감사인 책임이라면 탐정도 고용하고 감사범위도 확장해야 한다. 일부 사기꾼 때문에 대다수 선량한 감사 대상 기업에 엄청난 감사비용이 추가될 상황이다.

최근 장기적 계속감사가 부실을 유발한다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각종 인맥을 동원한 수주경쟁에서는 가장 낮게 엎드려야 선택받는다. 감사인 선임 주기가 짧을수록 독립성은 더욱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사외이사 중심의 감사위원회가 전권을 가지고 효율적 인적자원을 확보해 공정한 감사를 수행할 수 있는 감사인을 선임해야 한다.

투명한 회계보고와 공정한 외부감사가 담보돼야 효율적 자원배분이 가능하다. 수임 경쟁에 진을 빼고 내부공모 사기까지 배상하는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면 우수 재원이 떠날 수밖에 없다. 투명회계 정착을 위한 외부감사제도 개선이 시급한 과제다.

이만우 < 고려대 경영학 교수 leem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