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대기업 A사에 다니는 박 과장은 팀장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미국 유명 대학을 나와 해외 반도체업체 기획팀에서 일하다 몇 달 전 A사로 스카우트된, ‘잘나가는’ 유학파 출신이지만 보고서엔 도통 소질이 없다.

그는 이직 후 보고서 때문에 팀장에게 수차례 호된 질책을 받았다. 글씨체는 ‘바탕체’, 글씨 포인트 ‘13’, 줄간격 ‘160%’, 컬러는 ‘회색’ 등 정해져 있는 A사의 보고서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보고서는 내용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온 박 과장에게 이런 ‘규제’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외국에서는 이렇게 정형화된 포맷의 보고서를 만드는 곳은 없어요. 글씨체나 줄간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채는 한국의 직장 상사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직장인들은 보고서로 말한다’는 얘기처럼 보고서 작성 능력은 직장 생활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 매일 시간에 쫓기며 보고서와 전쟁을 치르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나눔고딕체를 사수하라”

중견기업 B사의 보고용 문서 글씨체는 모두 ‘나눔고딕’이다. 나눔고딕이 기본 글씨체로 자리 잡은 건 광고대행사 때문이다. 얼마 전 광고대행사가 B사에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자료에 나눔고딕체를 썼는데, 이를 본 사장이 그 글씨체에 꽂혀버린 것.

B사의 이 대리는 평소처럼 나눔고딕을 사용해 부장이 중국법인 대표에게 보고할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며칠 야근을 하면서 정성을 다했고 자료를 검토한 부장도 흡족해했다. 하지만 웬걸. 며칠 뒤 중국 출장을 떠난 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잔뜩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중국법인의 컴퓨터에는 나눔고딕체가 깔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료는 무용지물이 됐다. “그 사건 이후 우리 회사에는 어느 곳으로 출장 가더라도 발표자료와 함께 나눔고딕체를 인식할 수 있는 파일을 같이 보내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발표자료 잘 만들어 승진까지…

C그룹 기획팀 직원들은 각 계열사 사장들이 그룹 회장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들 때마다 디자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알록달록한 디자인과 예쁜 글씨체를 좋아하는 회장의 취향 탓이다. 발표가 끝난 뒤 늘 보고서의 디자인에 대해 평가하는 회장 때문에 계열사 사장들은 항상 부담이었고, 자료를 작성하는 기획팀을 닦달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런 까다로운 회장님의 ‘입맛’ 덕분에 고속으로 승진한 직원도 있다. C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이 과장이 주인공.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프레젠테이션 자료 작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입사 후 경영관리부서에서 10년간 일하면서 감각이 무뎌졌다.

이 과장의 자질을 눈여겨본 기획팀장은 어느 날 계열사 사장이 회장에게 보고할 자료 작성을 맡겼고, 그는 뛰어난 디자인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회장은 예상대로 보고서를 극찬했고 계열사 사장은 입이 귀에 걸렸다. 이 덕분에 그는 입사 동기들보다 2년 먼저 차장을 달게 됐다. “다른 계열사에서도 디자인 전문가를 영입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디자인에 신경 쓰다 숫자 틀려

보고서 형식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중요한 내용이 잘못돼 곤혹스러웠던 경험을 겪은 직장인들도 있다. 유통 대기업에 근무하는 조 차장은 최근 팀장으로부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핀잔을 들었다. 팀장이 사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발표 자료에 인용한 숫자가 틀렸던 것. 조 차장은 보고서를 최종 점검하다가 엑셀 자료를 잘못 건드려 제품별 매출 실적에서 0을 하나씩 빼버렸다. 평소 사내에서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으로 불리던 조 차장에겐 굴욕적인 일이었다.

사장과 주요 임원들은 ‘제품 매출 실적조차 모르는 놈이 누구냐’고 불같이 화를 냈고 조 차장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발표 자료를 만들 때마다 모든 팀원을 불러다 최종 점검하는 회의를 갖는다. “그동안 보고서 디자인 등 형식에만 신경 쓰느라 숫자 등 콘텐츠는 제대로 못 본 것 같아요.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알맹이가 틀리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죠.”

보고서는 ‘짧고, 쉽고, 간단하게’

대기업 D사에 다니는 4년차 사원 강모씨는 ‘보고서의 신(神)’으로 불린다. 그의 보고서를 본 임원들은 하나같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비결이 뭘까. 강씨의 보고서 작성 원칙은 간단하다. ‘짧고, 쉽고, 간단하게’가 전부다. 강씨가 만드는 보고서 분량은 대부분 1~2장짜리다. 어쩔 수 없이 5장을 넘기게 되면 전체 내용을 간추린 1장짜리 요약본을 만든다.

또 어려운 전문용어를 빼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작성한다. 보고서에 들어가는 그래픽도 현란한 디자인이 아닌 간단한 표가 전부다. “임원들은 하루에만 10개가 넘는 보고서를 보는데 분량이 길거나 내용이 어려우면 짜증 나지 않겠어요. 연세가 지긋한 임원일수록 눈을 아프게 하는 현란한 색채나 그래픽 대신 간단한 표를 선호합니다.”

지난해 대기업 E사에 입사한 김모씨는 대학 때 배운 프레젠테이션 기법 때문에 오히려 회사에서 욕을 먹은 케이스다. 김씨가 내세우는 강점은 파워포인트 문서 만들기. 대학 때 프레젠테이션 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탈 정도였다.

입사한 지 한 달가량 지난 뒤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보라는 부장의 지시에 신이 난 김씨. 모든 역량을 발휘해 자료를 꾸몄다. 화려한 애니메이션과 그래픽,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는 하이퍼링크는 기본. 김씨는 의기양양하게 파워포인트 자료를 내밀었는데 부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신이 아직 대학생인 줄 알아. 발표 자료로 왜 장난질이야. ” 김씨는 이후로 파워포인트 문서를 만드는 데 특기가 있다는 얘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강경민/김병근 기자 kkm1026@hankyung.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