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미국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외교장관 회담. 윤병세 외교부 장관(사진)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반갑게 포옹했다. 이에 화답하듯 케리 장관은 “한·미 관계는 한치의 빛도 샐 틈 없이 단단하다”며 윤 장관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두 장관 모두 일본과 관련한 문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주재 일본대사관은 미국 교과서에 일본해와 동해를 같이 표기하는 법안을 막기 위해 대형 로펌을 동원해 로비전을 펼치고 있었다. 윤 장관이 어떻게든 미국의 관심을 끌어내야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지난 23일.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에서 ‘동해 병기 법안’이 통과됐다. 찬성 31표, 반대 4표, 기권 3표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한국의 조용한 외교가 승리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처럼 정부가 개입해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면 역효과가 났을 것”이라고 했다.

윤 장관의 ‘조용한’ 외교가 올 들어 성과를 내고 있다. 논란이 벌어진 사안은 무조건 덮어두고 다음으로 미루던 과거와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물밑 작전을 펼친 결과다. 지난 19일 중국 하얼빈역에 문을 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일본은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며 극렬히 반발했다.

결국 외교부와 중국 정부는 극비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외교부는 안 의사와 관련한 사료 등을 몰래 지원하면서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통 보안을 유지했다. 기념관 개관식은 중국 인사 몇 명만 참석해 약 10분간 조촐하게 치러졌다. 정부 관계자는 “외교 문제로 행사를 화려하게 진행하지 못했지만 기념관으로까지 규모를 키운 것은 큰 성과”라고 했다.

현지 무장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최근 풀려난 한석우 KOTRA 리비아 트리폴리무역관장 구출 과정에서도 치밀하고 드러나지 않는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윤 장관의 조용한 외교는 작은 것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디테일’의 힘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윤 장관은 발표자료의 단어 하나, 마침표까지 일일이 챙기는 세심한 스타일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 비공식적으로 자주 만나 친목을 다지는 것을 선호한다. 윤 장관은 “외교는 거창한 회담으로 되는 게 아니다”며 “회담 후 산책하며 이야기하는 2~3분 동안 진짜 중요한 얘기가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주변국 외교장관들과 20~30분간 전화로 ‘수다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윤 장관은 지난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40분간 통화했더니 한·중 회담이 돼 버렸다”고 했다.

다만 이런 외교 스타일에 한계도 있다. 작은 것에 신경쓰다 보니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다소 소홀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 외교 성과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돌발 행동과 우경화에 ‘덕’을 입었다는 분석도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수동적인 외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