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시월드' 대신 해외 출장 "드디어 소원성취"…하필 설 때가 아내 생일…귀경길 매년 부부싸움
출판사 저작권 팀에서 일하는 김 과장(여·41)은 작년 말 회사 정기인사가 난 뒤 쾌재를 불렀다. 해외 작가를 함께 관리하는 담당 편집자가 비슷한 연차의 남자 동료에서 한참 어린 여자 후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 과장이 기뻐한 것은 부려먹을 후배가 생겨서가 아니다. 설 연휴에 시댁 대신 해외 출장을 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김 과장은 해외 작가 담당자와 함께 1년에 두 번씩 해외에서 작가를 만나 출판과 관련된 일을 협의해야 한다. 전남 여수가 시댁인 그는 그동안 ‘설이나 추석에 출장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지만 남자 동료와 함께 가야 하는 부담 탓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여자 후배가 새로 합류하면서 소원을 풀게 됐다. 만나야 할 해외 작가가 “이번주가 아닌 다음주가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김 과장은 그를 설득해 기어코 설 출장을 ‘관철’시켰다. 출근하지 않는 명절에 출장가기 싫어하는 어린 후배의 불만은 묵살됐다. 명절나기, 혹은 ‘명절 피하기’를 위한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모아봤다.

○남친과 해외여행→나홀로 고향 앞으로

대기업에 다니는 송 대리(여·31)는 설 연휴에 남자친구와 함께 일본 홋카이도를 여행하기로 약속했다. 작년 말 비행기표를 예약하고는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다. 여행 스케줄을 30분 단위로 빼곡하게 채워놓고 맛있는 먹거리와 유명 온천, 볼거리를 모두 머릿속에 입력했다. 설에 만나 같이 놀자는 친구들의 연락에는 코웃음을 치며 있는 대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올 들어 남자친구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뜸해지더니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다. 결국 며칠 전 남친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별통보가 왔다.

둘 사이를 잘 아는 그들의 친구는 이렇게 증언한다. “딱히 이별의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남자가 그동안 여자의 ‘기’에 많이 질렸던 것 같아요. 남자는 사실 설 연휴 동안 편히 쉬고 싶었는데 여자가 여행 쪽으로 강하게 몰고 갔나봐요. 여자가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여행 후에 헤어질까도 생각했지만 도저히 여행을 같이 갈 엄두가 안 났다고 해요.”

송 대리는 뒤늦게 위로라도 받고 싶어 친구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던 친구들은 모두 ‘선약이 있다’며 퇴짜를 놨다. 송 대리는 결국 설에 고향인 울산에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기 싫은 이유, 내려가고 싶은 이유

대형 유통업체의 김 부장(남·43)이 설에 고향(경남 진주)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아내의 생일이 설 바로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항상 귀경길 차 안에서 생일을 맞는다. 매년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근사한 생일상을 받고 싶은 게 아내의 마음. 하지만 생일 전날(설날) 시댁에서 종일 일을 해야 하고 그럴싸한 저녁은커녕 휴게소 밥으로 생일상을 때워야 하니 해가 갈수록 히스테리가 늘어만 간다. 김 부장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꽉 막히는 도로 위에서 아내의 투정을 보다 보면 마음처럼 받아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귀경길은 100% 부부싸움이다. “나름대로 아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잘해주려고 하는 데도 짜증이 나나 봐요. 저도 미안한 마음이지만 아내 생일을 옮길 수도 없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답답합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여사원 P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는 게 정말 싫었다. 매년 명절이면 입이 삐죽 나와 안 내려갈 핑계거리만 궁리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는 설을 앞두고 이상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얼른 내려가고 싶어 안달을 한다. 이유는 얼마 전 생긴 남자친구 때문.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온 대구 토박이다. P씨는 설 연휴 기간에 남자친구와 대구에서 만나 포항에 놀러가기로 했다. “명절이 이렇게 기대됐던 적은 처음이에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제 나이 때는 당연한 것 아닌가요.”

○“설 연휴에도 못 놀아요”…카드사 콜센터 비상

금융투자업계에는 명절이 없는 분야가 있다. 해외시장 거래와 관련된 영업직원, 백오피스(오퍼레이팅) 직원, 전산직원 등에게는 명절이 큰 의미가 없다. 아시아 시장은 쉬는 곳이 많지만 유럽과 미국 장은 설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설 연휴 내내 근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대로 출근해야 한다.

이때 직원들의 ‘계급별 먹이사슬’이 나타난다. 일단 명절 첫날이나 마지막 날은 무조건 고참직원 차지다. 올해 설 연휴 같은 경우에는 1월30일 혹은 2월2일이다. 그나마 하루만 일하면 사흘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급 직원은 연휴 한가운데 근무가 기본이다. 명절 당일(1월31일) 또는 그 다음날(2월1일)이다. ‘슬픈 연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막내급 사원은 그들이 모시는 사수가 고참인지 중간인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사수를 보좌하는 ‘서브’로 그들과 같은 날짜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간급 직원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고참 직원이 미혼일 경우에는 설 등 명절에 집안 모임에 가는 걸 꺼리기 때문에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있다. 첫날이나 마지막 날에 일하고 사흘을 쉴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여파로 위기를 맞은 카드사 콜센터도 명절이 없는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일반 상담 외에도 사고접수 등을 위해 24시간 무휴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보통 명절 근무 때는 전화도 거의 없고 조용하기 마련인데 올해는 정보 유출 파문의 직격탄을 맞을까 직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미 쉴 새 없이 몰려드는 고객 항의를 일선에서 감당해왔는데 연휴 기간마저도 ‘총알받이’가 될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벌써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태인데 설 연휴에도 설마 그런 상황이 벌어지진 않겠죠? 명절 근무가 이렇게 부담스럽기는 처음입니다.”

박한신/황정수/임현우/강경민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