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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포럼] 개성상인과 병영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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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경포럼] 개성상인과 병영상인
    창호지를 파는 강진 사람과 풀을 파는 개성 사람이 객주에서 한 방을 쓰게 됐다. 뚫린 창호지 문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오들오들 떨던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서로의 창호지와 풀로 문을 바르고 잤다. 다음날 새벽 개성 사람은 일찍 떠났다. 그러나 강진 사람은 전날 밤의 창호지를 물로 적셔 뗀 뒤 봇짐에 넣고서야 길을 나섰다.

    전남 강진 출신의 병영상인(兵營商人)이 개성상인(開城商人)보다 더 검약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화다. 개성상인이야 고려 때부터 비즈니스에 앞장섰던 궁예의 후예니 그렇지만 이름도 낯선 병영상인은 대체 어떤 이들인가. 병영상인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태동했다. 전라·제주를 관할하는 병영이 강진에 들어선 시기였다.

    상업 금했던 시절의 비즈니스

    1만명 이상의 군대와 2000여호의 민가가 생기자 군수용품과 생필품 수요가 급증했다. 병영상인은 이들 물자의 생산·유통·판매를 도맡으면서 급성장했다. 나중엔 만주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작은 것부터 팔며 밑바닥에서 장사를 배웠기에 물건을 취급하거나 손님을 상대하는 노하우가 남달랐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상업을 가장 천시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경제 기조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금지하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공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약 도매업으로 거부가 된 박기춘과 국내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한 아남산업의 김향수 회장, 앰코테크놀로지의 김주진 회장 등이 병영상인의 후예다.

    장사의 귀재들은 서로 통해서 개성상인과 합작회사를 세운 병영상인도 많다. 55년 전 국내 첫 종합곡분회사 대선제분을 공동창업한 박세정은 강진, 홍종문은 개성 출신이다. 이 회사는 종업원 150여명에 12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알짜 기업이다.

    600년 만에 부활한 병영상인

    하지만 병영상인은 개성상인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1895년 동학농민군에게 병영성이 함락된 뒤 상업터전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은 2000년대 들어서야 이뤄졌다. 얼마 전 병영상인 연구 결과가 한국경영사학회의 최우수 논문에 뽑혔고 엊그제에는 ‘장사의 기술-600년 병영상인의 비밀’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저자인 주희춘 강진일보 편집국장은 병영상인의 장사 비법을 ‘전국적인 유통망과 효율적인 관리, 과감한 투자, 도전정신과 겸손, 지리적 환경의 이점을 살리는 능력, 밑바닥 정신, 광범위한 시장 개척, 신용을 중시하고 동료를 배려하는 자세, 장사만 고집하는 프로근성’ 등 8가지로 꼽았다.

    박성수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는 “말 꼬리로 만든 붓 12자루만 있으면 밖에서 1년 먹을 걸 벌어 오는 게 병영상인”이라고 설명한다. 적은 밑천으로 장사를 하는 이들이 큰 배짱으로 전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투철한 상인정신 덕분이었다.

    600년 전 강진에서 싹튼 병영상인의 정신이야말로 맨주먹으로 성장 신화를 일군 우리 경제의 주축이자 한국형 기업가정신의 원형인지도 모른다. 하긴 삼성의 이병철도 삼성상회에서 출발했고, 현대의 정주영도 복흥상회로 시작했다. 두산 창업자 박승직 역시 보부상이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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