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衣食보다 住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일까’라는 이란 영화가 있었다. 어떤 국제영화제에서 상까지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지나온 이야기라도 늘 새롭게 보인다.

교실에서 신나게 떠들며 놀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들어오자 일순간 조용해진다. 긴장감까지 감도는 건 그날 숙제 검사 때문이다. 숙제를 공책에 해오지 못한 친구는 선생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고, 옆에 앉은 소년은 그 친구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숙제를 하다가 깜짝 놀란다. 실수로 아까 그 친구의 공책을 가져온 것이다. 아까 학교에서 선생님은 한 번만 더 숙제를 안 해오면 아예 학교로 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소년은 우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곤 공책을 들고 집을 나선다. 친구가 사는 마을을 향해 집집마다 헤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물어보지만 아무도 그 친구와 친구의 집을 모른다.

영화는 소년이 다시 집에 돌아와 밤새 친구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가슴 따뜻한 얘기로 끝나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소년이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는 동안 화면에 담긴 그 마을 사람들의 전체적인 삶에 대해서이다.

그 아이들 나이 때 우리도 학교에서 우리 생활에 기본적이며 필수적으로 필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의식주’라는 걸 배웠다. 그때 선생님은 ‘자는 집’보다 ‘먹고 입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이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만 해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집 없는 사람의 서러움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옛날얘기 역시 그렇다. 자식을 스물몇을 두었던 흥부 역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을 받았지 집 없는 설움 얘기는 없었다. 다른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 이야기도 아흔아홉 칸의 고래등같이 큰 기와집과 사시사철 비단옷에 소 몇 마리가 몇날며칠을 갈아야 하는 넓은 전답 이야기 정도이지, 집 여러 채를 가진 부자 이야기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도시가 형성되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시로 몰려들면서 수요와 공급의 가장 민감한 자리에 주택문제가 들어온 것이다.

최근에도 높은 자리의 공직자가 새로 임명될 때 청문회라는 것을 한다. 그리고 가끔 자신의 지난 시절에 있은 어떤 바르지 못한 일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고위 공직자들을 보게 된다. ‘그 바르지 못한 일’이라는 게 거의 대부분 부동산 투기였던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때의 현상 그대로 말한다면 부동산 개발시대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든 아니든 ‘위장전입’의 법까지 어겨가며 투기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살 집을 가지고 돈을 벌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다 막판에 집값이 다락처럼 오른 다음 은행빚까지 내어 자기 집을 마련한 사람들만 하우스푸어라는 이름으로 발을 구르고 있다. 그런 집값은 몇 년째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전셋값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기현상도 현대사회에서는 의식주문제 가운데 주택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단돈 오천원만 있으면 다섯 줄 한 세트의 로또복권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꿈으로 매주 거기에 매달린다. 매번 혹시나가 역시나로 이어지지만 그걸 알면서도 거기에 매달리는 열풍 안에는 그렇게 말고는 달리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보통사람들의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은 아닐까. 로또복권점에서 복권 몇 장을 사들고 나오는 남루한 행색의 저 사람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의 집은 또 어디일까. 영화 속의 아이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순원 < 소설가 lsw839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