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 터는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원인 하도감(下都監)이 있던 곳이다. 훈련도감은 궁궐수비와 임금 호위를 맡은 정예부대로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와 같다. 임진왜란이 터진 이듬해부터 고종 때까지 이곳에서는 쌀 6말의 월급을 받는 직업군인들이 날마다 무예를 닦았다.

그러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황량한 폐허로 변했다. 망국의 아픔과 역사의 생채기를 함께 간직한 이곳은 1925년 또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일제가 히로히토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경성운동장을 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성곽과 청계천의 이간수문 등 역사적 유물도 운동장 밑에 묻혀버렸다.

광복 후에는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6년 야구장에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된 뒤로는 조명탑 불빛 아래 결승전을 보러 온 야구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1970년대 고교야구의 명승부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자 동대문운동장으로 또 이름이 바뀐 뒤 점차 기능을 잃었고 숱한 논의 끝에 2008년 철거됐다.

운동장을 헐어내는 과정에서 서울성곽과 두 칸짜리 수문, 성벽 바깥의 치성(雉城) 등이 햇볕을 보게 됐고 이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되살아났다. 최근에는 그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DDP)’가 완공됐다. 오는 3월 개관하는 DDP는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곡선 설계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 주말 실물이 공개되자 ‘서울 한복판에 불시착한 우주선’ ‘도심에 똬리를 튼 거대한 구렁이’ 등의 품평이 이어졌다.

시민들의 평가에는 탄성과 비아냥이 혼재돼 있다. 5년 전 철거 때의 논란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정치 성향에 따라 ‘세련미’냐 ‘인간미’냐의 논쟁까지 불거지는 모양이다. 도시의 발전 단계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혹시라도 시장이 바뀔 때마다 근본 취지가 달라지는 ‘거꾸로 정책’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나 루브르박물관의 유리피라미드 입구, 브라질의 생태도시 쿠리치바까지도 당시에는 여론의 반대가 많았다.

개관기념으로 간송미술관의 국보급 작품들이 전시된다니 반갑다. 해마다 길게 줄을 서야 했던 간송 소장품전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됐다. 2층에선 훈민정음 해례본과 탄은 이정의 ‘문월도(問月圖)’ 5점, 겸재 정선의 ‘전신첩(傳神帖)’ 등 최고 작품 80여점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