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폭력'…내전·갈등의 땅 아프리카, 비극의 뿌리는 백인 마음대로 그은 국경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글로벌 이슈 따라잡기 -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분쟁
서방국가 식민지배 끝내며 부족분포 고려없이 국경 결정
서구식 중앙집권 모델 들여와 지도자 권력독점에 악용
종족간 갈등 치유 못하고 끝없는 쿠데타·내전 이어져
서방국가 식민지배 끝내며 부족분포 고려없이 국경 결정
서구식 중앙집권 모델 들여와 지도자 권력독점에 악용
종족간 갈등 치유 못하고 끝없는 쿠데타·내전 이어져
2007년 12월27일 케냐 대선일. 야당의 라일라 오딩가 후보는 개표 초반 100만표 이상을 앞서며 당선이 거의 확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개표 도중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대통령인 므와이 키바키는 개표를 중단시켰고, 이후 키바키가 23만표 차이로 승리했다는 결과 발표가 나왔다. 오딩가 후보 측의 ‘카렌진’ 족은 이를 키바키 대통령이 속한 ‘키쿠유’ 족의 음모로 판단, 폭력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결국 1500여명이 사망하고 35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대형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당시 케냐에 있던 교민 우만권 씨는 “얼굴에 부족 문양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반달 모양의 칼로 살해하는 일이 흔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가 서방에서 독립한 지도 50여년이 지났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끊임없는 내전과 분쟁에 휘말려 있다. 전문가들은 “식민 지배 이후 서방 국가들이 부족 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국경선을 나눈 게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아프리카에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가진 1500개 이상의 부족이 있다. ‘검은 폭력, 흰 뿌리(black violence, white root)’론이다.
○서방 편의로 나눈 국경선
아프리카 지도를 유심히 보면 국경선이 대부분 직선이다. 한 민족이나 공동체가 오랜 시간 함께 살면서 주변과 갈등하며 자연스레 만든 국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1884년 당시 독일 재상인 오토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베를린 회의’에서 임의로 정해진 것이다.
아프리카는 오랜 기간 종족 중심으로 유지돼왔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가 발간하는 ‘르몽드 세계사’는 “아프리카는 종족 자체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가를 만들기도 한다”며 “중앙집권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식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나이지리아엔 언어와 풍속이 다른 400개 종족이 있다. 통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독립 직후 아프리카 초기 지도자들은 이 같은 부족주의를 악용해 독재를 정당화했다.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대표적이다. 그는 일당 통치를 “부족의 특성을 살린 제도”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다당제는 각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 여러 개 생긴 것인데, 아프리카는 계급이 없기 때문에 다당제가 필요 없다는 궤변이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중앙아프리카 ‘황제’로 취임했던 장 베델 보카사는 초등학생들에게 자신이 얼굴이 새겨진 교복을 입게 하고, 거부하면 죽이기까지 했다.
독재가 고착화되면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특정 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같은 나라에 속한 다른 부족은 소외됐다. 내쳐진 부족들은 무장봉기로 권력을 잡으려 했다. 독립이 이뤄진 뒤 108건의 성공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중 38개 정권은 또 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내줬다.
○끊임없는 악순환
이 같은 악순환을 깨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선진국이 원조의 조건으로 민주화를 내걸면서 1990년대부터 아프리카에도 급속히 다당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11년 8월 현재 아프리카 20개국에서 집권당이 의회 의석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의 독재다.
케냐의 경우도 2007년 참사 이후 유엔이 중재를 시도했다. 대선에서 떨어진 오딩가를 총리에 앉혔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화해였다. 장관은 대통령파, 차관은 총리파가 차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부족이 만든 연합정부는 번번이 각종 정책 갈등을 빚었다. 아무리 선진국에서 원조를 해주고 정책을 만들어줘도 추진이 불가능한 구조다. 서강석 KOTRA 케냐 나이로비 무역관장은 “자리 나눠 먹기로 42개까지 늘었던 부처는 2010년 이후 17개로 줄었지만 자리 나눠 먹기는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선진국의 무리한 개입이 폭력 사태를 심화시킨 사례도 적지 않다. 소말리아는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가 실패하자 미국에 원조를 구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무기를 대주고 군사훈련도 시켰다. 소말리아 정부는 이 무기를 반대 부족을 학살하는 데 썼다. 이때 쫓겨난 부족들이 해적, 테러집단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9월 67명의 목숨을 앗아간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도 소말리아 난민의 소행이었다.
○서서히 보이는 희망
부족 간 갈등은 정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토지 문제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의 아프리카 특파원 로버트 게스트에 따르면 아프리카 전체에서 개인이 소유권을 갖고 있는 토지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부족들이 갖고 있다. 개인은 토지를 담보로 종잣돈을 얻어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 부족의 토지를 빼앗아 재분배하려는 행위는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희망도 보인다. 1990년대에는 아프리카 18개 국가에서 22차례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2000년대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2007년 유혈사태를 겪었던 케냐에서도 2010년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선거가 치러졌다. 크리스티안 미농구 아프리카연합(AU) 정책자문위원은 “최근 정치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젊은 층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아프리카가 서방에서 독립한 지도 50여년이 지났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끊임없는 내전과 분쟁에 휘말려 있다. 전문가들은 “식민 지배 이후 서방 국가들이 부족 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국경선을 나눈 게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아프리카에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가진 1500개 이상의 부족이 있다. ‘검은 폭력, 흰 뿌리(black violence, white root)’론이다.
○서방 편의로 나눈 국경선
아프리카 지도를 유심히 보면 국경선이 대부분 직선이다. 한 민족이나 공동체가 오랜 시간 함께 살면서 주변과 갈등하며 자연스레 만든 국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1884년 당시 독일 재상인 오토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베를린 회의’에서 임의로 정해진 것이다.
아프리카는 오랜 기간 종족 중심으로 유지돼왔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가 발간하는 ‘르몽드 세계사’는 “아프리카는 종족 자체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가를 만들기도 한다”며 “중앙집권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식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나이지리아엔 언어와 풍속이 다른 400개 종족이 있다. 통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독립 직후 아프리카 초기 지도자들은 이 같은 부족주의를 악용해 독재를 정당화했다.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대표적이다. 그는 일당 통치를 “부족의 특성을 살린 제도”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다당제는 각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 여러 개 생긴 것인데, 아프리카는 계급이 없기 때문에 다당제가 필요 없다는 궤변이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중앙아프리카 ‘황제’로 취임했던 장 베델 보카사는 초등학생들에게 자신이 얼굴이 새겨진 교복을 입게 하고, 거부하면 죽이기까지 했다.
독재가 고착화되면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특정 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같은 나라에 속한 다른 부족은 소외됐다. 내쳐진 부족들은 무장봉기로 권력을 잡으려 했다. 독립이 이뤄진 뒤 108건의 성공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중 38개 정권은 또 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내줬다.
○끊임없는 악순환
이 같은 악순환을 깨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선진국이 원조의 조건으로 민주화를 내걸면서 1990년대부터 아프리카에도 급속히 다당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11년 8월 현재 아프리카 20개국에서 집권당이 의회 의석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의 독재다.
케냐의 경우도 2007년 참사 이후 유엔이 중재를 시도했다. 대선에서 떨어진 오딩가를 총리에 앉혔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화해였다. 장관은 대통령파, 차관은 총리파가 차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부족이 만든 연합정부는 번번이 각종 정책 갈등을 빚었다. 아무리 선진국에서 원조를 해주고 정책을 만들어줘도 추진이 불가능한 구조다. 서강석 KOTRA 케냐 나이로비 무역관장은 “자리 나눠 먹기로 42개까지 늘었던 부처는 2010년 이후 17개로 줄었지만 자리 나눠 먹기는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선진국의 무리한 개입이 폭력 사태를 심화시킨 사례도 적지 않다. 소말리아는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가 실패하자 미국에 원조를 구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무기를 대주고 군사훈련도 시켰다. 소말리아 정부는 이 무기를 반대 부족을 학살하는 데 썼다. 이때 쫓겨난 부족들이 해적, 테러집단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9월 67명의 목숨을 앗아간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도 소말리아 난민의 소행이었다.
○서서히 보이는 희망
부족 간 갈등은 정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토지 문제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의 아프리카 특파원 로버트 게스트에 따르면 아프리카 전체에서 개인이 소유권을 갖고 있는 토지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부족들이 갖고 있다. 개인은 토지를 담보로 종잣돈을 얻어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 부족의 토지를 빼앗아 재분배하려는 행위는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희망도 보인다. 1990년대에는 아프리카 18개 국가에서 22차례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2000년대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2007년 유혈사태를 겪었던 케냐에서도 2010년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선거가 치러졌다. 크리스티안 미농구 아프리카연합(AU) 정책자문위원은 “최근 정치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젊은 층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