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연탄공장
우리나라에는 천연자원이 별로 없지만 무연탄은 꽤 많은 편이다. 신라 진평왕 때 동토함산지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일 일대의 갈탄 지역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무연탄을 조금만 가공하면 불땀이 좋고 값도 싼 연탄을 만들 수 있다. 최초의 연탄공장은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평양에 세운 것이다. 일제시대와 광복을 넘기면서 서서히 성장한 연탄산업은 6·25 이후 본격적인 활황을 맞았다.

초창기에는 연탄 구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화력을 키우기 위해 하나씩 구멍을 뚫게 됐고 구멍 수에 따라 구공탄, 십구공탄, 이십이공탄, 삼십이공탄 등의 이름을 붙였다. 1960년대부터는 연탄이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이 됐다. 식당, 사무실, 학교 등의 난로용으로도 인기였다.

연탄소비량은 1980년대 중반까지 급격하게 늘어 해마다 품귀와 사재기 파동을 빚을 정도였다. 한여름에 품귀현상이 일어난 적도 있다. 석유파동 이듬해인 1974년 7월 ‘정부가 기름을 주 연료로 쓰고 연탄은 보조연료로 하는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을 확 뒤집는다더라’는 얘기가 퍼졌고 무연탄 생산 감소로 연탄이 부족할 것이란 소문까지 겹쳐지는 바람에 난리가 난 것이다.

그렇게 ‘국민 연료’로 인기를 끌었던 연탄은 1988년 이후 가스·석유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겨울마다 골목 어귀에 수백장씩 쌓였던 연탄더미, 달동네까지 실어나르던 리어카와 지게, 편을 갈라 연탄재 던지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어려서 검고 젊어서 붉고 늙으면 하얘지는 건 뭐? -연탄’ 하던 수수께끼도 옛날얘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도 연탄이 필요한 곳이 많다. 혼자 사는 노인 등 형편 어려운 20만여 가구가 여전히 연탄에 기대어 겨울을 난다. 저소득층과 소외층의 난방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광해관리공단이 지원하는 ‘연탄쿠폰’ 대상만 8만가구 이상이다. 자원봉사단체인 연탄은행전국협의회가 해마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기부를 받아 어려운 이들에게 전달하는 연탄도 300여만 장에 이른다.

1970년에 18원이던 연탄값은 70년대 말 85원까지 올랐으나 라면 한 봉지 가격을 넘지 않았다. 요즘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500~600원에 묶여 있다. 대신 정부가 한 해 2000억원 안팎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한때 400곳을 넘었던 연탄공장도 이제는 50곳 이하로 줄었다. 그나마 서울에 남은 마지막 연탄공장까지 내년에 문을 닫는다니 아쉬움이 크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