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등화가친의 계절에
예부터 책을 읽는 일은 낮이 아니라 밤에 할 일이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 그걸 책과 친하자고 바로 말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밝힌 등불과 가까이 하자고 말했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말 역시 그렇게 나왔다.

이런저런 단체에서 문예작품 공모 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각 신문들의 신춘문예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작가에겐 문예행사의 심사 의뢰가 가장 많은 때도 지금이다.

그런 심사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욱 이런저런 공모전의 응모자들이 남자보다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글의 첫 구절이 식구들 모두 집을 나간 오전 시간 혼자 커피를 타들고 거실에 나와 창문을 열고 음악을 듣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만큼이나 바쁘게 일터로 나가야 하는 주부들도 많을 것이다. 자기 집 거실에 햇빛이 어느 만큼 들어왔다가 슬며시 도로 물러나는지를 모르고 바쁘게 사는 분들도 많다.

공모전에 응모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건 작품 속 인물의 모습만이 아니라 실제 글쓴이의 모습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여겨지는 부분이 많다. 매일 아침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바쁘게 남편과 아이들을 회사와 학교로 보낸 뒤 비로소 느긋해진 일상 속에 한 잔의 커피를 타들고 거실로 나와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깊이와 무게를 달아보고, 또 그런 햇빛 한가운데 앉아 음악을 듣는 모습이 저절로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거실 탁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모습들은 몇 작품 걸러 한 작품씩 나와도 아침 시간에 식구들 모두 밖으로 나간 다음 혼자 책상에 앉아 무얼 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작품들은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닐 땐 누구나 자기 책상을 가지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그렇다. 결혼하기 바로 전까지도 쓰던 책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서는 이상하게도 책상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을 하면 일단 먼저 쓰던 침대를 버림과 동시에 새 침대를 장만하고, 또 신혼살림으로 새 텔레비전과 새 냉장고, 새로운 식탁과 새로운 장롱, 새로운 소파까지 장만하면서 이상하게도 전에 쓰던 책상만은 있던 것도 버리고 결혼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전에 쓰던 책상을 새 신혼살림집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사정도 잘 알고 있다. 집이 좁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나중에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더라도 새로운 가구와 보다 큰 가구로 끊임없이 살림을 바꾸어도 결혼할 때 버린 자신의 책상만은 다시 장만하지 않는다.

그러다 요즘은 가정마다 컴퓨터와 인터넷망이 보급돼 있어 가족 공동의 책상 하나가 새로 생겨난 셈이다. 컴퓨터가 놓인 가족 공동의 책상이든, 아니면 자신의 책상이든, 집에 있는 동안 점점 책상에 있는 시간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는다. 놀이와 여가 시간 보내기도 컴퓨터로 이뤄진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다. 집안에만 있어도 예전보다 점점 책상에 앉을 일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예전에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지만 지금은 책상 위에서 컴퓨터에 매달리다 보니 공부나 독서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밤이 길어지며 말로는 늘 등화가친의 계절이며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사계절 중에 가장 책을 읽지 않는 계절이 가을과 겨울이라고 한다. 말로만 등화가친이 아니라 이 계절 저마다 꼭 읽고 싶었던,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밀쳐두었던 책 한 권 꺼내 읽는 것은 어떨까.

이순원 < 소설가 lsw839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