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연중 최저치 접근, 당국 가까스로 막았지만…
“5개 5.2에 보트(500만달러 1055원20전에 매도 주문), 30개보트 5.1에 던(3000만달러 매도 1051원에 체결)….”

20일 오전 서울 한 시중은행의 딜링룸. 외환시장이 열리자마자 전자, 자동차 등 수출업체들의 달러 매도 주문이 이어졌다. 지난달 24일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으로 1060원대를 회복했던 원·달러 환율이 또 다시 1050원대로 주저앉자 추가 하락을 예상한 기업들이 서둘러 달러를 처분했다. 간간이 수입업체의 매수 주문이 들리긴 했지만 대부분 매도 쪽으로 쏠리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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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환 딜러는 “원·달러 환율이 연중 최저치(종가 기준 1054.11원)에 접근하자 1050원 선 하향 돌파에 대한 관측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닷새 만에 반등했지만…

2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057원90전에 마감, 5일 만에 반등했다. 장 초반 1054원80전까지 떨어졌지만 오후 들어 외환당국이 강력한 개입에 나서면서 원화의 추가 상승을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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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하락세는 지난 19일(현지시간 기준)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보낸 재닛 옐런 미 중앙은행(Fed) 차기 의장의 서한 때문이었다. 옐런 내정자는 “실업률이 6.5%까지 떨어져도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향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약세가 이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비록 당국이 장 막판에 환율을 상승세로 돌려놓긴 했지만 당분간 원고 추세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시장 참가자들의 관측이다.

○당국 미묘한 기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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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원화 강세는 20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와 매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외환보유액, 우수한 재정 건전성 덕분이다. 이날 한은이 발표한 9월 말 국제투자대조표에서도 외화유동성은 더욱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9월 말 총대외채무에서 1년 미만 단기외채가 차지하는 비중(단기외채비중)은 27.1%로 14년3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원화가 싱가포르나 호주 달러처럼 새로운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기 시작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환당국 내부 기류도 조금 달라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지나친 쏠림으로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은 제어하겠지만 무조건 1050원 선을 사수하겠다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 정부의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시장을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가격의 방향보다는 속도와 폭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원화 강세는 원화만의 ‘나홀로’ 강세가 아닌 위험통화들의 동반 강세 속에 서 이뤄지는 것이어서 외환당국이 무제한 시장 개입을 하기에도 부담스런 상황이다.

이에 따라 미 양적완화 축소가 갑자기 빨라지지 않는 한 원화 강세 기조는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외환선물은 내년 1분기께 원·달러 환율이 1000원 선을 밑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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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 “양적완화 유지”

실제 가장 중요한 변수인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버냉키 의장은 19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전국 이코노미스트클럽 만찬 연설에서 “경제가 크게 호전됐지만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통화정책이 정상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재닛 옐런 차기 Fed 의장 내정자의 판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통화정책과 관련해 후임자와의 ‘찰떡 공조’를 강조한 셈이다.

버냉키 의장은 초저금리 정책을 시장의 예상보다 더 오래 지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양적완화를 종료한 후에도 상당기간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인플레이션이 2.5% 아래에 머무는 한, 실업률이 6.5% 이하로 내려갈 때까지 제로금리(0~0.25%)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종전 입장보다 초저금리를 더 오래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장 참여자들이 Fed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를 기준금리 인상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로라 로즈너 BNP파리바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양적완화 없이도 고용시장의 회복세가 지속될 수 있을지 Fed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풀이했다.

서정환/김유미 기자/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