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죄와 벌
젊은 시절 읽었던 소설 중 요즘도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20여년 전 ‘죄와 벌’을 소재로 정치에 관해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정치에 대한 단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 라스코르니코프는 법학을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고민하는 라스코르니코프의 눈에 전당포의 노파는 세상에 없어도 되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그는 몇 푼의 금품을 훔치고 아무 죄의식 없이 노파를 죽인다. 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노파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오만을 고백한 뒤 시베리아 유형의 길을 떠난다.

오늘의 현실 정치에는 수많은 라스코르니코프가 있다. 나는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상대방은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이 사방에 깔려 있다. 특히 여야가 예산이나 쟁점법안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국회본회의장에 가보면, 같은 하늘 아래서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싸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정치를 하려면 최소한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정치의 세계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념이 지나쳐서 나는 좋은 사람인데 상대방은 상종하기조차 싫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에 빠지면 결국 또 하나의 라스코르니코프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와 상대방을 선악으로 가르는 정도만 돼도 참아줄 수 있다. 이 증세가 심해지면 국민 가운데 상대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진보다 보수다 하는 현상도 이런 증세의 일종일 수 있다.

소설 속의 라스코르니코프라는 젊은 법학도는 살인을 하면서 자신은 전당포 노인과는 다른 존재라는 오만한 우월감으로 죄의식을 덮었다. 현실 속 우리 정치인들도 라스코르니코프와 같은 오만함으로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에 오늘의 이 불통의 정치판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라스코르니코프는 몸은 비천하지만 맑은 정신을 가진 소냐를 만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우리 정치인들에게 소냐는 누구일까? 만난다 해도 라스코르니코프처럼 자신의 독선과 오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정몽준 < 국회의원·새누리당 mjchung@n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