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67) 북한산 김개남장군길 / 동학의 불꽃, 백운대 남벽에 타오르다
[김성률 기자] 청주 병영 공격에 실패한 김개남은 패전장수가 되어 태인 화문산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매부의 집에 숨어든다. 김개남은 아전출신의 부호인 옛 친구 임병찬에 구명을 하였으나 친구는 그를 배신한다. 김개남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이고 관군을 부른 것이었다. 김개남은 뒷간에서 변을 보다가 관군이 집을 포위하며 투항을 권하자 "누던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다"고 하고 볼일을 다 마친 후 잡혀갔다고 한다. 바로 그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김개남을 만나러 가던 전봉준은 상금에 눈이 먼 부하들에게 잡혀 관군에 넘겨진다. 1895년 12월27일의 일이었다.

전주로 끌려온 김개남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심문을 받는다. 이도재는 김개남을 임의로 처형한다. 정식재판을 생략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김개남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양반들의 탄원과 함께 부하들의 위세가 대단한데다가 ‘개남국왕’으로까지 불렸던 김개남을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김개남은 전주 초록바위라 불리는 곤지산 자락의 바위 언덕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김개남의 시체는 갈가리 찢겨져서 전시되었다. 배를 갈라 간은 큰 동이에 담고 그에게 원수진 사람들은 그의 살을 씹기도 하고 가져다가 그로인해 죽은 이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그의 머리는 함지박에 담겨 서울로 보내졌고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되었고 또다시 전주로 내려와 효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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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체포되어 정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받은데 비하여 김개남이 이렇게 모진 처형을 받은 것은 그가 농민혁명을 추진하면서 기득권 세력 즉 사대부인 양반과 완전히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죽이고 양반들을 잡아다가 매를 치기도 했다.

김개남은 키가 작은 전봉준과 달리 기골이 장대하고 성미가 괄괄했다고 한다. 적이라 생각되면 가차없는 제재를 가하고 동지라 생각하면 설령 여염집 여자를 데려다 마누라를 삼아도 관대하게 봐주었다고 한다. 김개남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실존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백운대 남면에 있는 바윗길인 ‘김개남 장군길’을 취재하기로 하고 살펴본 김개남 장군의 개인사는 파란만장했다.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치열하고도 처연하게 불꽃을 태우고 간 그의 이름이 왜 다시 백운대 남면에 떠올랐을까, 잠시 생각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해왔다.

11월10일. 낮기온이 15도 내외였던 날씨는 갑자기 10도나 떨어져 낮최고기온이 영상 5도에 불과했다. "백운대 남면은 그래도 볕이 많이 드는 지역이라 따뜻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도선사 주차장을 출발한다.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67) 북한산 김개남장군길 / 동학의 불꽃, 백운대 남벽에 타오르다
마침 이날은 살레와컵 서울익스트림 대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야영장과 백운산장 일대는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와 임원들로 붐볐다. 서울시산악연맹(회장 조규배)에서 주최한 서울익스트림 대회는 인수봉, 숨은벽, 곰바위, 코끼리크랙 등에서 자유등반, 인공등반, 믹스등반, 어센딩, 티롤리안 브리지, 브리지다운, 하울링, 응급처치 등의 각 과제에서 시간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초대형 아웃도어업체가 아닌 중견기업이 후원한다는 것이 칭찬할만했다.

위문을 넘고 나무계단을 내려서 작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접어들면 아주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은 우측으로 녹두장군길의 진입로가 된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다보면 확연하게 검은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 전에 확보용 볼트가 박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가 바로 김개남 장군길의 출발지점이다.

기자는 김개남장군길을 등반하다 선등자가 첫 볼트를 걸지 못하고 추락하는 바람에 두 발목이 골절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선등자는 물론이고 후등자조차 등반이 어려운 바윗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등반선을 살펴보았다. 거리 30미터의 첫째 마디는 아래에서 보기에는 역시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였는데 이것이 김개남장군길을 선등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별하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막상 붙게 되면 만만치 않은 난이도 때문에 고전을 하게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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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의 등반계획은 네 명이 두 팀으로 나누어 함 대장의 선등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는데 이날 같이 등반하기로 한 선등 클라이머의 사정으로 부득이 한 팀 등반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등반자는 모두 네 명, 인수봉 건양길의 개척자 함기철 대장과 다음카페 ‘암벽과 릿지’의 카페지기인 김경열 클라이머 그리고 선수급의 윈드서핑과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황인석 클라이머가 그들이다.

김개남장군길은 모두 다섯 마디에 등반거리는 약 170m. 최고난이도는 첫째 마디의 5.11a. 출발지점에서는 둘째 마디의 중간 위치인 약 45미터 지점까지 확인을 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 마디의 등반선은 알파벳 더블유(W)자를 왼쪽으로 세워서 길게 늘인 모양이다.

그런데 등반선을 확인하던 황인석(45) 클라이머가 "저 정도라면 한번 붙어볼만하겠는데요"라고 자신 있게 선등을 자처한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암장운동을 꾸준히 해와 인공암장에서는 5.11a급을, 자연 바윗길에서는 5.11급인 설악산 ‘솜다리의 추억’길을 온사이트 완등한 실력을 갖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는 달리 팔씨름이 무척 강해서 웬만한 상대는 1초 만에 끝내버리는 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등반순서는 자연히 1팀이 황인석-기자, 2팀이 함기철-김경열의 순서로 정해졌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황 클라이머가 빌레이어용 볼트에 퀵드로를 걸고 힘차게 출발한다. 출발지점 바로 위 다이아몬드형 크랙의 오른쪽으로 치고 올라가 발디딤 장소에 붙어있는 작은 솔가지를 털어가며 첫 볼트에 무사히 퀵드로를 걸었다. 이곳까지의 난이도는 5.9정도. 주의만 기울이면 첫 볼트를 걸기 전에 추락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어서 두 번째 볼트에도 무리 없이 퀵드로를 걸고 크럭스 지점인 세 번째 볼트로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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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발을 흐르는 홀드에 잘 짚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해 짧은 추락을 하고야 만다. 다시 한 번 루트 파인딩을 한 황 클라이머는 재도전을 했으나 역시 추락. 반칙을 한다하더라도 다음 볼트에 퀵을 걸 수 없는 상황, 결국 마지막 도전에도 실패하고 황 클라이머는 분루를 삼키며 하강할 수밖에 없었다.

부득이 함기철 대장이 크럭스 구간에 자일을 걸어주고 다시 내려오기로 했다. 크럭스 구간까지 거침없이 올라간 함 대장은 신중하게 두 번을 시도한 끝에 크럭스를 통과하여 세 번째 볼트에 퀵드로를 걸었다. 첫째 마디의 복병은 여섯째 볼트를 걸 때 다시 한 번 나타난다. 풋홀드를 발로 짚고 일어서야 하는 구간이다. 함 대장은 이 부분도 깔끔하게 등반했다.

변경된 계획대로 함 대장은 하강하고 다시 1팀이 먼저 올라가야하는 상황이지만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태여서 둘째 마디부터 다시 황 클라이머가 1팀 선등을 서기로 하고 기자부터 등반을 시작한다. 셋째 볼트에 진입해보니 역시 5.11a급의 난이도라 할만 했다. 오른발을 믿지 못하면 결코 일어 설 수 없고 만만치 않은 밸런스가 요구되는 지점이었다. 관건은 오른발을 홀드에 정확히 딛고 완전히 일어서서 만세를 부른 손으로 약간 흐르는 홀드를 잡고 일어서는 것이다. 크럭스를 통과하고도 확보점까지는 충분한 완력과 밸런스가 필요하다. 막상 이곳에 붙게 되면 의외로 고도감과 경사가 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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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클라이머가 첫째 마디 등반을 마치고 확보지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팀을 둘로 나누냐의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선등자가 다시 바뀌면 등반리듬이 깨어질 수도 있다. 더하여 바람이 다시 강하게 불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는 체감온도는 영하 5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럴 때 경험보다 우월한 능력은 없다. 첫째 마디의 등반순서로 등반을 이어가기로 한다. 그러다보니 사진촬영을 해야 할 기자가 부득이 세컨으로 선등빌레이와 후등빌레이를 보게 되었다. 함 대장의 멋진 클라이밍 장면을 많이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함기철 대장은 “5년 전 김개남 장군길을 등반할 때에는 별 어려움 없이 등반을 마쳤는데 5년 사이에 등반근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첫째 마디 등반소감을 말한다. 오늘 선등에 실패한 황인석 클라이머는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설욕을 하고 말겠다”고 각오를 밝힌다.

둘째 마디는 크랙선을 따라 오르는 페이스성의 바윗길이다. 거리는 역시 30미터 직상으로 세 개의 볼트를 통과하여 왼쪽으로 완전히 넘어서면 확보지점이 나타난다. 누운 디에드르 크랙 형태의 첫 구간을 통과하여 왼편으로 완전히 넘어가면 이번에는 깐깐한 페이스성 슬랩구간이 나타난다. 작은 홀드를 찾아 잡고 발디딤은 과감하게 딛고 서야 한다. 다행히 인수봉 인기루트처럼 바위가 미끄럽지는 않은 편이다. 페이스 구간은 꽉 찬 5.10c의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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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마디 확보지점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우측으로 약간 올라간 지점에서 빌레이를 보았다. 특이한 것은 셋째 마디 이후로는 쌍볼트 확보점이 보이지 않았는데 등반자의 안전을 위해서 보수가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등반팀은 볼트에 슬링줄을 걸고 가까운 크랙에는 캠을 쳐서 균등확보를 한 후 빌레이를 보았다.

셋째 마디는 거리가 약 35미터, 난이도 5.10a의 슬랩, 크랙 혼합구간이다. 짭짤한 슬랩 구간의 난이도가 5.10a이고 이 구간을 통과하면 크게 어렵지 않은 크랙이 나오면서 셋째 마디가 마무리된다. 셋째 마디 확보지점은 오픈된 상태여서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어왔다. 빌레이를 보는 손과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 그런지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더 춥게 느껴진다.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릿발 같이 느껴지는 이 바윗길에 이름을 남긴 김개남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가 다시 궁금해진다.

1853년생인 김기범은 전라도 태인 땅 산외면 지금실에서 태어났다. 지금으로 치면 전북 정읍 태생이다. 부잣집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병서 읽기를 즐겨했고 무척 개구쟁이여서 통도 크게 콩서리나 닭서리가 아닌 돼지서리를 해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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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은 장성하면서 과도한 세금과 관의 억압 등으로 고통스런 삶을 사는 농민과 서민의 편에 서있었다고 한다. 그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90년경으로 보인다.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포교를 한 끝에 다음해에는 '접주'가 된다. 그의 권유로 같은 일가인 도강 김 씨들이 대부분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중농이어서 한 마을에서 자라난 전봉준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과는 달리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김기범은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開南)' 즉 남쪽을 개벽하라는 글자를 써주자 바로 그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즉 김개남은 태어날 때의 이름이 아니라 개명을 하여 얻게 된 이름이다. 1891년 동학의 2대교주인 최시형이 1891년 태인에 들어서자 김개남은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김개남은 고부의 접주인 전봉준, 무장의 접주 손화중 등과 각별한 친교를 맺게 된다. 그는 동학의 집회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서서히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1892년부터 1893년까지는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교조신원운동은 이를테면 중앙정부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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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조신원운동이 묵살되고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이 계속되자 우리역사에서 최초로 반봉건·반외세를 표방하며 농민이자 민중이 봉기하고야 만다. 1894년 초,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고부민란을 일으켰고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켰다. 동학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라도·충청도 일대의 농민이 적극적으로 참가한 가운데 김개남 장군은 전주성과 남원성 등 동학혁명 초기 전투에서 연전연승한다. 김개남은 남원에 거주하며 전라좌도를 관할하며 폐정개혁까지 추진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당시 김개남은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민부대원들은 자연히 노비나 백정이 주류를 이루었고 승려와 장인, 재인 등이 합세했다. 기존의 질서에 가장 큰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기에 이들 천민부대는 지나가는 양반의 갓을 찢어버리는가 하면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양반인 상전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기까지 했다. 게다가 김개남은 흥선대원군의 밀사를 죽이려 했는가 하면 현직 수령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내리칠 정도로 과격한 면도 보여주었다. 김개남의 이 같은 행동은 그의 체포이후 양반들의 저열한 복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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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0월에는 1만 여명의 동학군이 다시 모여 드디어 11월7일, 서울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동학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충청도 진잠현 지금의 대전광역시를 점령하고 13일에는 청주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전투에 개입하면서 청주에서 패퇴하고야 만다.

이제 김개남 장군길의 마지막 고비인 넷째 마디가 남아있다. 거리 35미터, 난이도는 5.10b정도이지만 오히려 둘째 마디보다도 까다롭게 느껴지는 크랙과 슬랩 등반구간이다. 셋째 마디 외볼트 확보지점에서 캠을 치고 오버행 크랙을 넘어서야 한다. 좌향의 사선형 크랙이어서 확보물을 정확히 설치하고 등반을 해야 한다. 군데군데 확실한 재밍이 필요하므로 재밍장갑을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 약 10여 미터의 크랙이 이어지다가 밴드와 슬랩이 이어진다. 밴드구간이 5.10b정도의 난이도가 나온다. 밴드 우측으로 이동하는 구간의 밸런스에 유의해야 한다.

드디어 마지막 다섯째 마디. 거리 약 30미터의 다섯째 마디는 좌향 크랙의 윗부분에 캠을 설치한 후 왼쪽으로 넘어가면 걸어가도 될 만큼 수월한 슬랩구간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김개남장군길의 정상지점이다. 아침 11시경 등반을 시작해서 이곳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빵으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들고 등반방향의 우측 굴로 빠져나가니 약 30미터 위에 백운대 정상이 보인다.

강추위와 빡센 난이도로 호된 등반을 마친 후 기자는 김개남 장군길에 대해서 더욱 깊은 궁금증이 갖게 되었다. 백운대 남면의 신동엽길에 이은 김개남 장군길과 녹두장군길. 이 바윗길들은 어떤 이유로 개척되었을까?

김기섭 씨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참고로 그가 쓰는 글에는 쌍시옷과 쌍디귿이 없다. 전신불수인 그는 누워서 보조기를 끼우고 컴퓨터 자판을 치는데 옆으로 누워서 컴퓨터를 하다보니까 쉬프트키를 누르지 못해서 생긴 결과물이다. 짧은 글을 쓰는 데에도 팔에 통증을 느낀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 36편 - 설악산 석황사골 ‘몽유도원도’를 읽으면 된다.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67) 북한산 김개남장군길 / 동학의 불꽃, 백운대 남벽에 타오르다
Q. 1994년 김개남장군길과 녹두장군길을 개척하게 된 동기와 각 피치별로 어떤 등반을 기대하며 길을 냈는지?
경원대학교산악부는 동학혁명을 다룬 서사시 ‘금강’을 집필한 시인 신동엽을 기리기 위해 1993년 북한산 백운대에 '시인 신동엽길'을 개척햇ㅅ습니다. 이후 1994년은 동학혁명 100년이 되는 해엿ㅅ습니다. 그래서 동학혁명의 3대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에 대한 길을 백운대에 내려고 살핀 곳이 사진 상의 백운대 남벽이엇ㅅ습니다. 이 벽은 남서벽에 비해 ㅈ잛긴 하지만, 위문에서 용암문으로 가다보면 상당히 위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벽이엇ㅅ습니다. 그래서 얼추 개척 등반선을 찾아보니 3개의 긴 등반선이 보여 이곳을 개척 대상지로 삼고 개척에 들어갓ㅅ습니다.

전 어ㄷ던 길을 낼 ㄷ대 몇 가지 원칙이 잇ㅅ는데, 그 중 하나가 되도록 자연적인 바위 선을 ㄷ다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운대 남벽은 바위가 페이스에 가ㄱ가워서 길 내기가 가능할ㄱ가 의구심을 가졋ㅅ는데, 잘 관찰한 결과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을 연결할 수 잇ㅅ어 가능햇ㅅ습니다.

2. 개척당시 누구와 함께 작업을 했는지?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개척 당시 라태균이란 후배와 작업을 많이 햇ㅅ는데, 저나 라태균 후배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야영장에서 술을 많이 축냇ㅅ습니다. '김개남장군길'은 김기섭 라태균 김동진 등이 개척햇ㅅ으며, '녹두장군길'은 김기섭 라태균 이종서 김동진 등이 개척햇ㅅ습니다.

3. 개척방식은 등반방식인가 아니면 하강을 해서 내려오면서 볼트를 박았나?
'김개남장군길'이나 '녹두장군길'은 위에서 하강용 볼트를 박은 후 위에서 후배들이 확보를 해주면 제가 하강한 후 두세 번 오름짓을 거듭해 그에 맞게 볼트 세팅을 햇ㅅ습니다. 개척한 한참 후, 이 두 길을 월간 ‘마운틴’에 소개하러 취재 등반을 갓ㅅ습니다. 먼저 '김개남장군길' 2피치를 부분 선등햇ㅅ을 ㄷ댄 어ㄷ던 놈이 볼트 행거를 없애는 바람에 무척 살 ㄷ덜리게 등반햇ㅅ고, 5피치 확보지점 ㅅ상볼트 행거도 없애버려 다시 가서 재설치햇ㅅ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다리가 후달리는 곳도 볼트를 보강햇ㅅ습니다.

4. 김개남장군길 녹두장군길이라고 이름붙인 이유. 1994년 당시 김개남장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학혁명에 잇ㅅ어 가장 큰 역할을 햇ㅅ던 이는 녹두장군이엇ㅅ고, 그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잇ㅅ고, 저 ㄷ도한 잘 알고 잇ㅅ엇ㅅ습니다. 그런데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 여행기인 ‘조선과 그 이웃들’이란 책을 읽다가 책 내용 가운데, 그녀가 광화문을 지나다 목격한 것을 기록한 대목이 잇ㅅ엇ㅅ습니다. 그건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한양으로 압송된 후 광화문에서 효수되어 죽창에 머리가 걸린 김개남장군에 대한 이야기엿ㅅ는데,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왓ㅅ고, 그 잔상은 녹두장군보다 오히려 오래토록 남아 잇ㅅ엇ㅅ습니다. 그래서 이 벽에서 가장 길고 어려운 루트를 만들면 김개남장군길이라 명명하려고 햇ㅅ고, 길이 완성된 후 그렇게 이름을 지엇ㅅ습니다. 이후 우측 등반선을 완성한 후 '녹두장군길'이라 명명햇ㅅ습니다. 그 다음에 '김개남장군길' 좌측에 '손화중장군길'을 개척하려 햇ㅅ으나 다른 곳으로 개척하려고 눈을 돌리는 바람에 개척을 하지 못햇ㅅ습니다. 이후 이곳이 많이 알려지면서 '손화중장군길' 라인은 다른 팀에서 개척하는 걸 봤습니다.


사후 역도이자 미치광이 정도로 여겨졌던 김개남은 그러나 세월을 뛰어넘어 화려하게 부활한다. 지금 그는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동학혁명의 3대 지도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그의 허묘만 만들어져 있지만 김개남의 실묘 추정 지역인 전북 임실군 학암리 주민들은 동학혁명 이듬해인 1895년에 전주에서 참수당한 장군 시신을 동학교도들이 수습해 마을 가까운 속칭 백이산에 묘를 썼다는 말이 내려왔다고 하여 그의 실묘를 찾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주 덕진공원에는 김개남 장군 추모비가 세워졌다. 추모비에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이 쓰여져 있다. 동학혁명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려졌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라는 노래의 도입부분이다.

동학혁명 기간 동안 무려 4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다. 19세기말 조선팔도의 인구가 약 1,300만명, 서울의 인구가 불과 20만 수준이라면 그 피해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바람은 하나였다. 봉건세상을 타파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그리고 더하여 외국세력을 몰아내고 자주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되는 특별한 해였던 1994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혁명의 정점에 서있던 녹두장군과 김개남장군을 기리기 위해 개척된 김개남 장군길.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본 김기섭과 라태균, 김동진에 의해 개척된 김개남 장군길은 단순한 바윗길을 뛰어넘어 불꽃처럼 치열했던 김개남의 삶과 역사의 현장으로 클라이머들을 이끌고 있는 기념비적인 바윗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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