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두고 정국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23일 대선을 불공정 선거로 규정하고 ‘라이벌’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을 그 수혜자로 직접 지목했기 때문이다. 문 의원은 박 대통령의 책임론까지 거론하며 결단을 촉구했고, 새누리당은 “대선 불복 본심을 드러낸 저급한 정치적 노림수”라고 반박하면서 파장은 커지고 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오른쪽)이 2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현미 의원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민주당 의원(오른쪽)이 2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현미 의원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

문 의원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국정원 댓글 의혹에 대해 침묵하는 박 대통령에게 “본인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 권력기관과 군의 정치 중립성, 심지어 수사기관의 독립성까지 모두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 의원은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박 대통령은 그 수혜자”라며 “문제 해결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즉각 실천에 나서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은 아니다”는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인용해 대선 불복 논란을 차단하려 했지만 성명의 수위는 거칠고 격앙돼 있었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과하고 국정원장을 비롯한 관련자에 대한 엄정한 문책 및 국정원 개혁에 적극 나서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정치권에서는 대화록 미이관 사태에 대한 검찰의 수사 발표가 이달 말로 예정돼 있는 가운데 국면 전환을 모색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도 국정원 댓글 의혹을 ‘신(新)관권선거’ ‘중대 국기문란 범죄’로 규정하고, 박 대통령에 대해 총공세를 폈다. 김 대표는 “나라가 이렇게 난리 났는데도 박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한다”며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은 전 정권의 책임일지라도 이와 관련된 수사 문제와 외압은 현 정권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대선 불복을 언급하는 일부 의원의 강경발언에다 이날 문 의원의 대선 불공정 성명까지 나오면서 민주당 지도부는 한편으로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고 있다. 여권의 ‘대선 불복 프레임’에 말리지 않으려는 지도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당내에서 나오고 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왼쪽)와 정몽준 의원이 23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왼쪽)와 정몽준 의원이 23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불복 본심 만천하에 드러내”

새누리당은 문 의원과 민주당의 ‘부정선거’ 주장을 ‘대선 불복’으로 몰아붙이며 총공세를 폈다. 특히 ‘박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한 문 의원의 성명에 대해선 “국가기관이 현재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미리 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영향을 끼치려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민주당 일각의 대선 불복 움직임은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논란의 싹을 잘라내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황우여 대표는 “문 의원은 역대 어느 대선 후보도 넘지 않았던 선을 넘고 있고, 이는 대인의 모습이 아니다”며 “국민 주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비판했다. 또 “대선 불복성 발언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언동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대선 불복 선언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문 의원이 드디어 대선 불복에 대한 자신의 본심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며 “박 대통령에게 책임 운운하는 것은 대선 후보까지 지냈던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서병수 의원도 “2002년 대선 당시 집권세력 일부와 검찰이 김대업을 앞세운 ‘병풍(兵風)’ 공작정치를 해서 우리 후보가 57만여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때도 우리는 그 결과를 존중했다”며 “사초폐기 의혹을 은폐하려는 정당이 108만표 넘게 패배했는데도 1년이 다 되도록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다만 정몽준 의원은 “이 지경까지 사태가 이른 데는 정부와 여당의 책임이 크다”며 “문제가 있다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질 자세를 보이는 게 집권당의 도리”라고 말했다.

손성태/이정호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