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스펙초월 채용'을 넘어서
최근 과도한 학벌중심의 노동시장 관행에 대한 자성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은행권 및 대기업을 중심으로 소위 ‘탈(脫)스펙(Spec) 채용’이 확산되고 있다. 포스코는 올해 초 지원서류에 학력과 출신학교 등을 없앤 ‘탈스펙 전형’을 포함한 850여명의 인턴사원을 뽑아, 이 중 근무성적 우수자는 정규직으로 채용할 계획이다. 가을 신입직원 공채에서 수출입은행은 채용 홈페이지에서 본인 이름만 입력하고 같은 날 제시되는 기금 관련 에세이만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스펙초월 지원자 전형’을 별도로 실시했다.

정부도 학교, 학점, 영어성적 등 스펙과 관계없이 직무능력이나 역량 평가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능력중심의 채용을 확산시키기 위해 ‘스펙초월 멘토스쿨’을 운영할 계획이다. 해당분야를 대표하는 실무형 멘토가 잠재력과 열정이 있는 청년 멘티(mentee)를 지도한 뒤 취업에 성공시키는 탈스펙 채용을 확산시킬 방침이다.

그러나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당수의 청년 구직자는 스펙초월 채용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42.4%가 스펙초월 채용 확산 추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어차피 기본 스펙을 갖춰야 할 것 같아서’, ‘뭘 준비해야 할지 막막해서’, ‘외향적인 일부에게만 유리할 것 같아서’, ‘공정한 경쟁이 어려울 것 같아서’, ‘일반전형과 별도로 준비해야 해서’,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해서’ 등을 들었다. 스펙초월 채용이 확산돼야 하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탈스펙 채용에 대한 이와 같은 우려는 대학 교육을 통해 인적 자원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느냐에 대한, 경제학에서 해결하지 못한 논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단의 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대졸자의 급여가 고졸자보다는 지속적으로 높기 때문에 교육이 인적자본의 생산성을 제고시켰다고 보는 반면, 고용주들은 인력을 채용할 때 학벌을 대체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기준이 없어 학력이 가장 중요한 채용 기준이 되고, 결과적으로 대졸자의 급여가 고졸자보다 높다는 주장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노동시장에서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 꼭 대학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지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는 대학졸업장 자체가 대기업에의 취업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대졸자들이 노동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 반면,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핵심인력 위주로 운영하면서 대졸자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크게 늘어나지 않는 구조가 됐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구직자들은 스펙 쌓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스펙 자체가 구직자를 선별하는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탈스펙 채용은 그 확산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학력 등 스펙을 초월하는 능력중심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학력을 대체할 수 있는, 노동시장에서 통용되는 새 채용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현장에 기반한 국가직무능력표준제도(NCS), 이에 기준한 교육과정 모듈 개발, 그리고 NCS와 연계한 국가자격체계 구축이 가지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NCS 기준 교육과정 모듈이 현재는 특성화고와 전문대만을 대상으로 개발되고 있지만 향후에는 일반 대학 그리고 산업현장 훈련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모듈이 개발돼야 한다.

정부가 내년부터 추진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근로자로서 산업현장에서 이론과 실무교육을 받고 대학 학위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일·학습 듀얼 시스템’에 대한 기대도 크다.

능력중심 사회 구축에 기여하면서 산업체에서 요구하는 맞춤역량을 갖춘 인력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독일의 듀얼시스템을 벤치마킹한 ‘일·학습 듀얼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중소기업의 인력난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영범 <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원장·한성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