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정몽원, 아이스하키팀 20년째 믿음으로 이끌어…스포츠에서 배운 인내와 신뢰로 위기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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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오피스 - 절치부심 리더십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비즈&라이프] 정몽원, 아이스하키팀 20년째 믿음으로 이끌어…스포츠에서 배운 인내와 신뢰로 위기 돌파](https://img.hankyung.com/photo/201309/01.7835032.1.jpg)
정 회장이 아이스하키장을 찾은 건 벌써 20년째다. 그는 만도기계 사장이던 1994년 남들처럼 야구나 축구가 아닌 비인기 종목인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했다. 국내에 고작 세 개 프로팀만 있는, 시쳇말로 ‘돈 안되는 종목’인 아이스하키를 왜 20년간 후원한 걸까. 한라그룹 관계자들은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의리가 정몽원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힘들 때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믿음’
한라그룹이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한 건 1994년. 당시 그룹 계열사였던 만도기계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정 회장은 ‘에어컨 홍보’를 위해 팀을 창단했다. 물론 반대가 심했다. “1년에 수십억원의 운영비가 드는 데다 인기도 없는 종목을 왜 후원하느냐”는 불만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팀을 만들고 난 몇 년 뒤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룹은 부도가 났고 팀을 후원하던 만도기계도 다른 회사에 팔렸다. 주변에선 ‘그만 (팀을) 해체하라’는 말이 쏟아졌다.
그때, 창단 후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팀이 1998년 처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당시 아이스하키팀의 우승은 위기를 맞은 정 회장과 그룹 임직원들에게 모처럼 웃음을 줬다. 정 회장은 “어려웠던 시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큰 위안이 됐다. 이렇게까지 선수들이 해주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팀을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1998년 이후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등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면서도 아이스하키팀은 끝까지 유지한 것. 그는 또 해외 출장 등 부득이한 일정이 있을 때를 빼고는 늘 안양 한라경기장을 꼭 찾아 선수단을 격려했다. 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은) 올해 초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구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꼬박 20년을 선수들을 자식처럼 대했다”며 “자비를 들여 선수들을 핀란드로 전지훈련을 보내줄 정도”라고 설명했다.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이긴 날, 정 회장이 회식 자리에서 외치는 건배사가 있다.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리라’. 성경의 한 구절이다. 직원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다. 그룹 임원은 “서로 간 믿음을 바탕으로 힘을 합하면 못할 게 없다는 뜻”이라며 “정 회장이 한라를 재기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고 귀띔했다.
군림하지 않는 겸손의 리더십
‘믿음의 철학’은 회사 경영에서도 한결같은 원칙이다. 정 회장은 소위 말하는 ‘재벌 2세’다. 그의 부친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고(故)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그룹이 공중분해될 위기와 뇌졸중 투병을 겪고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보이며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으로 불렸다. 그런 선친의 뒤를 이어 정 회장은 1997년 1월 한라그룹 회장에 올랐다. 그런데 1년도 채 안된 그해 12월 한라그룹은 부도를 냈다. 한때 재계 12위에 올랐던 한라그룹은 대부분의 계열사 경영권을 채권단과 다른 기업에 넘겨야 했다. 마지막 남은 건 한라건설 하나뿐. 그마저도 회생을 위해 30%의 인력을 구조조정해야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도운 건 직원들이었다. 노조 주도로 1006명의 직원 중 302명을 스스로 구조조정했다. 남은 직원들은 연·월차 수당 반납, 임금동결을 결의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정말 힘들었지만 고통 뒤에 얻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직원들도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한마음 한몸이 되면서 한라그룹이 재기할 수 있었다.” 그때 이후 한라그룹은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회사와 직원들이 믿음으로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정 회장의 뜻에 따른 방침이다.
믿음에서 비롯한 특유의 겸손함도 갖췄다는 게 정 회장에 대한 주변의 평가다. 그룹 총수답지 않게 그는 늘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대한다. 매년 7월20일 경기 양평에서 열리는 정 명예회장 추모행사에 가본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놀란다. 그룹 한 임원은 “테이블에 소주가 떨어진 것까지 알고 손수 들고 갈 정도로 사람들을 챙긴다”고 전했다.
결단력과 뚝심의 리더십
부드럽지만 결단력과 뚝심이 없었다면 위기를 돌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라건설이 건설경기 침체로 경영난을 겪게 되자 증자를 추진했다. 만도가 한라건설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만도의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 등이 반발하자 정 회장은 이들을 만나 설득하고 각종 보완책을 내놓았다. 시장의 신뢰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2008년 만도를 되찾아올 때도 그의 뚝심은 빛을 발휘했다. 미국의 대형 자동차 부품업체인 TRW 회장이 정 회장을 찾아와 만도를 넘기라고 회유했을 때도 이를 과감하게 거절했다. 상황이 어려워도 잃었던 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선친인 정 명예회장이 가장 좋아했던 ‘學如逆水行舟 不進則退(학여역수행주 부진즉퇴:배움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하게 된다)’를 되새기며 언제나 노력하는 경영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이태명/전예진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