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안택수 "낙하산 소리 듣기 싫어…5년 동안 결근 않고 독하게 일했죠"
2008년 7월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선임되자 ‘낙하산 인사’라는 수근거림이 나왔다. “낙하산 이사장이라는 얘기를 듣기 싫어 이를 악물고 일만 했다”는 그는 두 번이나 연임(연임 임기는 1년)하며 신보 사상 최장수 이사장이 됐다. 지난 7월 세 번째 임기가 만료됐지만 후임 인사가 늦어지면서 5년2개월여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택수 이사장 얘기다.

신보 임직원들은 5년 전 ‘낙하산 안택수’를 이제 ‘신보의 중시조(中始祖)’라고 부른다. 쇠퇴한 집안(신보)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다. 그가 재임했던 지난 5년간 보증재원이 되는 기본재산은 3조7000억원에서 6조1000억원으로 65% 늘었다. 반면 부실률은 부임 전 5%에서 최근 4.2%로 낮아졌다.

신보는 최근 차기 이사장을 선출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이달 말 새 이사장이 선임되면 안 이사장은 ‘기나긴’ 임기를 마치게 된다. 기자로 출발해 공무원, 국회의원, 공공기관 이사장까지 거치며 어느덧 일흔이 된 그를 만났다. 안 이사장은 “잘하려고 애는 썼지만 평가를 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했다.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국회의원보다 신보 생활이 훨씬 보람 있었다”며 “신보와 기보를 합치는 것이 중소기업을위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국회의원보다 신보 생활이 훨씬 보람 있었다”며 “신보와 기보를 합치는 것이 중소기업을위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재임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2008년 7월 취임하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를 만나 혼이 났습니다. 당시 신보 예산은 한 해 9500억원에 불과했죠. 정부를 설득해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1조원을 더 받아냈습니다. 이걸 가지고 금융위기 전까지 1년에 9조원가량이었던 보증 규모를 2009년에만 17조원 이상으로 늘렸습니다. 이 돈으로 중소기업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입니다.”

▷업무량이 갑자기 늘어나 직원들의 불만이 컸다고 하던데요.


“직원들 모두 평소의 두 배씩 일해야 했습니다. 보너스를 받기는커녕 연봉이 오히려 줄었는 데도 말이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공기관인데 일반 사기업 직원처럼 해서 되겠느냐고 설득했습니다. 애국심을 갖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금융위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힘들어하는 중소기업이 많습니다.


“신보의 보증 확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은행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금융위기가 왔던 2009년 한 해 대출 증가액이 21조1000억원이었습니다. 이 중 신보가 보증한 것이 42%였습니다. 은행이 보증기관의 보증 없이 대출해준 것은 12%밖에 안 됩니다. 국민과 국가의 허락을 받고 돈벌이를 하는 은행이 리스크를 떠안지 않으려 한 것이죠. 은행들이 지금보다 더 리스크를 부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재임 중 가장 역점을 뒀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보증방식을 개선하는 일이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보증방식을 살펴봤는데, 기업의 신용등급과 직전 연도 매출액 등 과거 데이터만 가지고 보증 지원 여부를 결정하더군요. 부실률이 올라가는 것만을 염려하는 아주 보수적인 보증방식이죠. 기업의 과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를 평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09년부터 기업의 성장성과 미래가치를 심사해 보증지원 여부 결정에 활용하게 했습니다. 걱정했던 부실률은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그만 두려니 아쉬운 점은 없는지요.

“지금 중소기업 금융지원 기능이 여러 기관에 분산돼 있습니다. 이것을 한곳에 모아야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 지원만을 위한 전문 금융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보와 기술보증기금을 합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기보는 처음부터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탄생한 기관입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 표심을 얻기 위해 정치권이 신보의 업무를 떼내서 부산에 기보를 설립한 것이죠. 이 때문에 지금까지 두 기관이 비슷한 일을 하면서 비용은 두 배로 들고 있어요. 이를 줄여 보증 재원으로 쓰는 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비록 1년씩이지만 연임을 두 번씩이나 해 ‘복 받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만.

“2011년 7월 첫 연임은 임기 중 성과가 좋았다는 평가 덕분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작년 재연임은 사실 좀 쑥스러웠죠. 퇴임 기자간담회까지 하고 떠날 준비까지 다 끝냈으니까요. 갑자기 재연임을 하라고 해서 많이 당황했지만 정부가 선택한 것이니까 따르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살다가 이런 일도 겪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국회 재정경제위원장까지 했는데요. 새 정부의창조경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창조경제의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금융 지원이 더해져 기업이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적절한 자금 지원이 이뤄져야죠. 하지만 향후 부실을 걱정하는 보수적인 금융기관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실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에도 부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최근 주목받는 이스라엘의 요즈마펀드도 부실률이 낮은 편이 아닙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경제민주화가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 상황부터 고려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 경제는 현재 대내외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체질이 약화되고 있어요. 이럴 때는 기업에 부담과 긴장을 주는 제도 시행을 조금 미루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고, 신축적으로 적용해야죠. 우리 경제가 좀 더 건강해질 때까지 말이죠.”

▷당분간 미뤘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경제민주화를 하자는 의미인가요.

“아닙니다. 경제민주화에도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최근 경제민주화 입법은 현재 우리 경제와 단계가 맞지 않아요. 지금보다 좀 더 낮은 단계의 경제민주화 조치부터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경제 체질이 더 강해지면 경제민주화 조치도 좀 더 높은 단계로 올리면 됩니다.”

▷경제민주화 등에 대해 정부보다 정치권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정치권이 포퓰리즘의 포로가 됐어요. 그럼 나라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때로는 국민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정치권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역(逆)포퓰리즘적인 입법을 용기 있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자, 공무원, 정치인 등 직업을 다섯 가지나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요.

“밖에서 보면 국회의원이 제일 그럴 듯해 보입니다. 막상 겪어 보니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이 가장 보람있는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을 3선이나 했지만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끼긴 힘들었습니다. 공중의 뜬 구름 같은 직업이라고나 할까요. 이에 비해 신보에서는 성취감과 보람을 가장 크게 느꼈습니다. 매년 잘한 것과 못한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5년 동안 신보에 정이 많이 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마다요.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 신보의 보증을 통해 되살아나는 것을 볼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정상화된 기업들이 지금도 가끔씩 감사 편지를 보내고 있죠. 그 맛에 지난 5년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독하게 일을 했어요. 지금은 더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조직에 활기가 더 생기니까요. 보람과 긍지를 안고 떠나게 돼 기쁩니다.”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인지요.

“에이, 아닙니다. 늙은이가 무슨 정치입니까. 책도 읽고 지난 일도 정리하며 푹 쉴 생각입니다.”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지금까지 5개의 직업을 가졌다. 1968년 한국일보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정치부 기자와 사회부 차장을 거쳐 1980년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냈다. 기자로서 자긍심은 컸다.

하지만 일을 주도적으로 하기보다는 남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1982년 공무원으로 변신해 5년간 보건사회부 공보관(대변인)을 맡았다. 1988~1990년 국민연금공단 재정이사를 거쳐 1996년 정계에 투신했다.

15~17대 국회의원 시절 국정감사장에서 피감기관 사람들을 호통치던 강단 있는 모습, 한나라당 대변인을 하면서 날선 비판을 쏟아냈던 모습은 국민들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 있다.

3선을 지낸 그는 18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해 2008년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정치인 출신이 잘할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국내 중소기업 대출 순증액 21조1000억원의 41.7%인 8조9000억원의 보증을 지원하며 소방수 역할을 톡톡히 해 이런 우려를 잠재웠다.주요 공공기관장으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연임했다.

정리=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