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됐으면 출세했네" 소리 듣던 고졸 여사원, 입사 34년만에 건보공단 첫 여성임원 됐다
“여성이라고 해서 어려운 일이나 직무를 면제받고 싶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난주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인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임원이 나왔다. 1만2500여명의 직원 가운데 단 6명뿐인 임원 중 한 명이다. 고졸 사원으로 입사해 34년 만에 ‘별’을 단 박경순 건보공단 징수상임이사(사진)가 주인공이다. 그에겐 건보공단 안에서 ‘여성 최초’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통합 건보공단이 출범하기 19년 전인 1979년 공무원·사립학교교직원 의료보험공단에 입사한 그는 공단 내 기혼 여직원 1호, 최초의 여성 차장·부장·지역본부장이었다.

지난 17일 서울 염리동 건보공단 본사에서 만난 박 이사는 임원 자리에 오른 비결을 묻자 “여성이 꺼리는 보직에 스스로 지원해 일한 점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 사이에서 ‘루이보스’로 불린다. 편안한 누이 같으면서도 보스로서의 리더십을 갖췄다는 뜻이다.

박 이사가 공단에 입사한 당시엔 직장 내 남녀차별이 심했다고 했다. “심부름은 모두 제 차지였고 승진에서도 손해를 봤죠. 그래도 묵묵히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알아주기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어요. 회사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모양이에요.”

차장 시절, 한 남성 동료로부터 “여자로 그만하면 출세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오히려 ‘원동력’이 됐다. “아차 싶었죠.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이 많은데 말이에요. 야간대학에 등록해 주경야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 만에 다시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수석을 도맡아 했다. 2001년엔 사회복지학 석사학위까지 땄다.

박 이사는 새 보직으로 옮길 때마다 새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고 했다. “부산지역본부장으로 발령나 가보니 로비가 너무 삭막하더라고요. 바로 포토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누리마루와 광안대교 같은 부산의 상징물을 큰 사진으로 뽑아 로비를 꾸몄다. 한쪽에는 노인장기요양보험 같은 건강보험 제도를 캐릭터를 통해 소개하는 코너도 만들었다.

본사 고객지원실장으로 일할 땐 연간 1억2000만건의 민원처리를 담당했다. 그가 실장으로 발령받았을 당시 정부가 평가한 건보공단의 고객만족도는 ‘미흡’이었다. 민원 통화 연결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불만이 많았다. “자동응답기의 민원 접수 안내부터 고객 친화적으로 바꿨죠. 여러 사람을 거쳐야 하는 복잡한 민원처리 시스템도 간단하게 조정했고요.” 이 같은 박 이사의 노력은 지난해 건보공단의 고객만족도 평가를 ‘우수’로 밀어 올렸다. 징수상임이사로서 그의 목표는 현재 소득 이외에도 재산, 성별, 나이 등을 기준으로 하는 보험료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