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 장사하던 27세 청년, 주물설비 인수해 압연롤 외길 "獨·日 강소기업과 경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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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기업인 생생토크 - 민종기 케이티롤 사장
아령 거쳐 롤 생산…37년간 철강 '한우물'
"사업은 위기극복 과정"…품질·해외시장 개척해 돌파
일본 등 25개 국가에 수출…"이젠 대형 제품에 도전장"
아령 거쳐 롤 생산…37년간 철강 '한우물'
"사업은 위기극복 과정"…품질·해외시장 개척해 돌파
일본 등 25개 국가에 수출…"이젠 대형 제품에 도전장"
1974년 서울 양평동 해태제과 부근. 한 청년이 햇빛도 들지 않는 허름한 건물 안 경사진 계단 밑으로 낡은 책상을 옮기고 있었다. 고철 ‘나까마(중간도매상)’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계단 밑 빈 공간이 그의 사무실이었다. 임차료는 없었다. 대신 계단 청소를 해주는 조건으로 건물주에게서 공간을 얻었다. 직원은 단 1명. 근처 고등공민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 시간제로 와서 전화를 받고 장부를 정리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6년 경기도 평촌에 간판이 걸렸다. 신양주공이다. 그 청년은 주물업체에 고철을 납품했으나 돈을 떼이자 주물설비를 인수했고 이를 발판으로 연면적 200㎥ 규모의 공장에서 아령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청년 이름은 민종기.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 회사가 케이티롤의 전신이다.
민종기 케이티롤 사장은 지금 66세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케이티롤 공장 안에 들어서면 뜨거운 열기가 후끈 다가온다. 거대한 용광로에서 쇠를 끓인 뒤 이를 틀에 부어 압연롤(roll)을 만드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다. 쇠에 망간 크롬 등 각종 금속을 넣어 강도를 높인 뒤 이를 깎고 열처리하는 공정을 거쳐 각종 압연롤을 생산한다.
압연롤은 철근·형강·선재·강판 등을 만드는 장치다. 마치 수제비를 만드는 원통형 밀대처럼 생겼다. 롤의 홈 모양에 따라 다양한 철강제품이 나온다.
이 회사는 종업원 102명에 작년 매출이 233억원인 전형적인 중소기업이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에 압연용 롤을 수출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독일에서는 잘슈탈 바디셰슈탈베르케 등이, 일본에선 신닛테쓰스미킨 JFE 니폰스틸 등이 거래처다. 국내에서는 포스코와 동국제강 세아베스틸 등과 거래하고 있다.
민 사장은 “중소형 압연롤 분야에서는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해 케이티롤을 일궈냈을까.
첫째, 37년 동안 철강 관련 제품에서 한우물을 팠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민 사장은 초등학교 때 상경해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낮에는 형이 운영하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에 국민대 상학과를 다녔다. 그의 형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양평동에서 공장을 경영했다.
하지만 형의 회사가 부도나자 자신도 대학을 중퇴하고 뒷수습에 나섰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심했다. “당시엔 나도 사업을 해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민 사장은 말했다. 그래서 다른 회사 취업을 포기하고 고철 도매를 시작했다.
그뒤 아령을 만들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평촌에 약 5000㎡의 땅을 살 정도로 돈을 모았다”고 말했다. 아령은 쇠를 녹여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막주물이었다.
그다지 기술이 필요 없었지만 당시 ‘체력은 국력’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아령 수요가 급증했다.
좀 더 부가가치가 높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에 도전하고 싶었다. 전기로를 도입해 1987년 철강 압연롤을 개발했다. 이듬해 형강용 압연롤, 선재용 압연롤을 잇따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민 사장은 “제품 개발과 시설 투자를 많이 했는데 매출로 연결되지 않아 사업을 지속할지를 놓고 고민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는 국내 거래업체 14개 중 무려 9개가 부도나 18억원을 물렸다. 그 뒤 몇 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이 중 14억원을 회수했다. 이렇게 그의 사업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압연롤 한우물을 팠다. 그는 사업 자체가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둘째, 해외 시장 개척이다. 그는 외국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1994년 일본과 동남아 시장을 뚫었다. 민 사장은 “일본의 한 업체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출장비로 1000만원 이상 썼는데 겨우 500만원어치 주문을 받아온 적도 있다”며 해외 시장 개척이 쉽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민 사장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도 이집트에 압연롤을 수출하면서 얻은 환차익 덕분”이라고 말했다.
수출은 회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수렁에서 구해주는 효자가 됐다. 이렇게 하나씩 개척한 수출국가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25개국에 이른다.
셋째, 품질 우선주의다. 민 사장은 “제품을 만들 때 원가 절감보다는 품질 향상에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롤 생산은 자동화가 어렵기 때문에 공정마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투명 경영을 하자, 세금을 100% 내자, 선도기업이 되자’가 그것이다. 민 사장은 “특히 종업원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이익이 나면 그 중 일부는 종업원 성과급으로 돌렸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의 사명은 ‘좋은 롤을 만들어 철강산업 발전에 헌신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 사장의 경영철학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이제 대형 롤 생산에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다. 민 사장은 “충남 예산에 5만㎡의 부지를 확보한 것도 대형롤 생산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언어학과와 미국 미시간대(경영학 석사)를 졸업한 뒤 대기업 근무를 거친 아들 민인욱 경영기획실장(37)이 칠순을 앞둔 민 사장 어깨의 무거운 짐을 조금씩 덜어주고 있다.
"화성엔 기업 1만개 넘는데 대중교통 너무 불편해 인력난"
민종기 사장은 작년 초 화성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민 사장은 “화성에는 1만2000개 기업이 있고 이 중 상의 회원은 2700개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화성은 서울에서 가깝고 수원과 지척이지만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그는 “많은 업체가 구인난에 시달리는 것도 결국 불편한 교통 때문”이라며 “화성에 수많은 기업이 있는 점을 감안해 대중교통 문제 해결에 각계에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상의 회장이 되면서 몇 가지에 역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다. 우선 관내 중소기업들의 인력 확보다. 연 3회 취업박람회를 열고 구인·구직을 연결시키고 있다. ‘내수기업의 수출기업화’에도 나서고 있다. 민 사장은 “내수시장에만 안주하면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수출을 지원하고 있다”며 “영세한 기업 현실을 감안해 통역, 부스 임차, 바이어 상담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민 사장은 “기업인들도 공부해야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경영대학원 등에서 공부했고 지역 기업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도입해 함께 수강하고 있다. 민 사장은 “기업이 경쟁력을 가져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다”며 “상의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회원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그로부터 2년 뒤인 1976년 경기도 평촌에 간판이 걸렸다. 신양주공이다. 그 청년은 주물업체에 고철을 납품했으나 돈을 떼이자 주물설비를 인수했고 이를 발판으로 연면적 200㎥ 규모의 공장에서 아령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청년 이름은 민종기.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 회사가 케이티롤의 전신이다.
민종기 케이티롤 사장은 지금 66세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케이티롤 공장 안에 들어서면 뜨거운 열기가 후끈 다가온다. 거대한 용광로에서 쇠를 끓인 뒤 이를 틀에 부어 압연롤(roll)을 만드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다. 쇠에 망간 크롬 등 각종 금속을 넣어 강도를 높인 뒤 이를 깎고 열처리하는 공정을 거쳐 각종 압연롤을 생산한다.
압연롤은 철근·형강·선재·강판 등을 만드는 장치다. 마치 수제비를 만드는 원통형 밀대처럼 생겼다. 롤의 홈 모양에 따라 다양한 철강제품이 나온다.
이 회사는 종업원 102명에 작년 매출이 233억원인 전형적인 중소기업이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에 압연용 롤을 수출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독일에서는 잘슈탈 바디셰슈탈베르케 등이, 일본에선 신닛테쓰스미킨 JFE 니폰스틸 등이 거래처다. 국내에서는 포스코와 동국제강 세아베스틸 등과 거래하고 있다.
민 사장은 “중소형 압연롤 분야에서는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해 케이티롤을 일궈냈을까.
첫째, 37년 동안 철강 관련 제품에서 한우물을 팠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민 사장은 초등학교 때 상경해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낮에는 형이 운영하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에 국민대 상학과를 다녔다. 그의 형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양평동에서 공장을 경영했다.
하지만 형의 회사가 부도나자 자신도 대학을 중퇴하고 뒷수습에 나섰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심했다. “당시엔 나도 사업을 해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민 사장은 말했다. 그래서 다른 회사 취업을 포기하고 고철 도매를 시작했다.
그뒤 아령을 만들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평촌에 약 5000㎡의 땅을 살 정도로 돈을 모았다”고 말했다. 아령은 쇠를 녹여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막주물이었다.
그다지 기술이 필요 없었지만 당시 ‘체력은 국력’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아령 수요가 급증했다.
좀 더 부가가치가 높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에 도전하고 싶었다. 전기로를 도입해 1987년 철강 압연롤을 개발했다. 이듬해 형강용 압연롤, 선재용 압연롤을 잇따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민 사장은 “제품 개발과 시설 투자를 많이 했는데 매출로 연결되지 않아 사업을 지속할지를 놓고 고민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는 국내 거래업체 14개 중 무려 9개가 부도나 18억원을 물렸다. 그 뒤 몇 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이 중 14억원을 회수했다. 이렇게 그의 사업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압연롤 한우물을 팠다. 그는 사업 자체가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둘째, 해외 시장 개척이다. 그는 외국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1994년 일본과 동남아 시장을 뚫었다. 민 사장은 “일본의 한 업체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출장비로 1000만원 이상 썼는데 겨우 500만원어치 주문을 받아온 적도 있다”며 해외 시장 개척이 쉽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민 사장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도 이집트에 압연롤을 수출하면서 얻은 환차익 덕분”이라고 말했다.
수출은 회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수렁에서 구해주는 효자가 됐다. 이렇게 하나씩 개척한 수출국가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25개국에 이른다.
셋째, 품질 우선주의다. 민 사장은 “제품을 만들 때 원가 절감보다는 품질 향상에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롤 생산은 자동화가 어렵기 때문에 공정마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투명 경영을 하자, 세금을 100% 내자, 선도기업이 되자’가 그것이다. 민 사장은 “특히 종업원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이익이 나면 그 중 일부는 종업원 성과급으로 돌렸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의 사명은 ‘좋은 롤을 만들어 철강산업 발전에 헌신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 사장의 경영철학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이제 대형 롤 생산에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다. 민 사장은 “충남 예산에 5만㎡의 부지를 확보한 것도 대형롤 생산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언어학과와 미국 미시간대(경영학 석사)를 졸업한 뒤 대기업 근무를 거친 아들 민인욱 경영기획실장(37)이 칠순을 앞둔 민 사장 어깨의 무거운 짐을 조금씩 덜어주고 있다.
"화성엔 기업 1만개 넘는데 대중교통 너무 불편해 인력난"
민종기 사장은 작년 초 화성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민 사장은 “화성에는 1만2000개 기업이 있고 이 중 상의 회원은 2700개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화성은 서울에서 가깝고 수원과 지척이지만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그는 “많은 업체가 구인난에 시달리는 것도 결국 불편한 교통 때문”이라며 “화성에 수많은 기업이 있는 점을 감안해 대중교통 문제 해결에 각계에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상의 회장이 되면서 몇 가지에 역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다. 우선 관내 중소기업들의 인력 확보다. 연 3회 취업박람회를 열고 구인·구직을 연결시키고 있다. ‘내수기업의 수출기업화’에도 나서고 있다. 민 사장은 “내수시장에만 안주하면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수출을 지원하고 있다”며 “영세한 기업 현실을 감안해 통역, 부스 임차, 바이어 상담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민 사장은 “기업인들도 공부해야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경영대학원 등에서 공부했고 지역 기업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도입해 함께 수강하고 있다. 민 사장은 “기업이 경쟁력을 가져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다”며 “상의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회원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