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 영혼 달래고 국가유공자 환자 달래려고 풀피리 부는 할아버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꽃피는 부산항에….’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위치한 김해보훈요양원 1층. ‘고향무정’의 구슬픈 멜로디가 들여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6·25 낙동강 전투때 경북 의성에서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이봉우 씨(82·사진)가 풀 잎사귀로 만들어 내는 풀피리 소리였다. 그는 “이맘 때면 늘 바로 옆에서 쓰러져간 전우들의 희미한 얼굴들과 고통소리가 귀에 들려 잠을 못 이룬다”며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잘 지내라고 한과 즐거움이 담긴 노래들을 풀 피리로 하늘을 향해 분다”고 말했다.
이봉우 씨는 전우들의 영혼을 위로해온데 이어 최근에는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국가유공자 환자들에게 고통을 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풀피리를 휴게실에서 불고 있다. 자원봉사를 위해 학생들이 찾아오면 함께 풀피리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른다. 이 때문에 그는 요양원에선 ‘잎사귀 피리 부는 할아버지’로 불린다. 요양을 담당하고 있는 박선애 김해보훈요양원 간호과장은 “200여명의 요양자 중에 164명이 유공자”라며 “이들은 잎사귀 피리소리가 나면 서로 모여 노래도 부르고 슬펐던 과거 이야기로 서로 정신적, 육체적 아픔을 나눈다”고 설명했다.
그가 풀피리를 배운 것은 15살때. 울산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그는 산에 갈 때면 늘 풀을 뜯어 부는 연습을 하면서 소리를 익혀갔다. 그가 잎사귀 피리를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으면서부터다. 1951년 20살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해 일주일 동안 훈련을 받고 곧 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동료 55명과 함께 낙동강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선이 형성된 의성지역 산악지대에서 매일 총을 쏴댔습니다. 3일 정도 지나니 동료의 절반 정도가 죽어 나갔죠. 한 일년 가량 전쟁을 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양측고관절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때부터 고통도 잊고 먼저간 동료를 위로하기 위해 한이 담긴 풀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이 씨는 “당시 동료 중 글을 아는 사람이 3명 밖에 없을 정도로 배운 사람은 없었지만 나라와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애국심 하나만은 컸다”며 “힘을 갖춰 북한의 야욕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 생각없이 어린 나이에 군대에 갔다가 비극적인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국민들은 이들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전쟁을 사전에 대비해 후손들이 피해를 입지않도록며 해야지요.”
김해=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위치한 김해보훈요양원 1층. ‘고향무정’의 구슬픈 멜로디가 들여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6·25 낙동강 전투때 경북 의성에서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이봉우 씨(82·사진)가 풀 잎사귀로 만들어 내는 풀피리 소리였다. 그는 “이맘 때면 늘 바로 옆에서 쓰러져간 전우들의 희미한 얼굴들과 고통소리가 귀에 들려 잠을 못 이룬다”며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잘 지내라고 한과 즐거움이 담긴 노래들을 풀 피리로 하늘을 향해 분다”고 말했다.
이봉우 씨는 전우들의 영혼을 위로해온데 이어 최근에는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국가유공자 환자들에게 고통을 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풀피리를 휴게실에서 불고 있다. 자원봉사를 위해 학생들이 찾아오면 함께 풀피리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른다. 이 때문에 그는 요양원에선 ‘잎사귀 피리 부는 할아버지’로 불린다. 요양을 담당하고 있는 박선애 김해보훈요양원 간호과장은 “200여명의 요양자 중에 164명이 유공자”라며 “이들은 잎사귀 피리소리가 나면 서로 모여 노래도 부르고 슬펐던 과거 이야기로 서로 정신적, 육체적 아픔을 나눈다”고 설명했다.
그가 풀피리를 배운 것은 15살때. 울산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그는 산에 갈 때면 늘 풀을 뜯어 부는 연습을 하면서 소리를 익혀갔다. 그가 잎사귀 피리를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으면서부터다. 1951년 20살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해 일주일 동안 훈련을 받고 곧 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동료 55명과 함께 낙동강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선이 형성된 의성지역 산악지대에서 매일 총을 쏴댔습니다. 3일 정도 지나니 동료의 절반 정도가 죽어 나갔죠. 한 일년 가량 전쟁을 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양측고관절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때부터 고통도 잊고 먼저간 동료를 위로하기 위해 한이 담긴 풀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이 씨는 “당시 동료 중 글을 아는 사람이 3명 밖에 없을 정도로 배운 사람은 없었지만 나라와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애국심 하나만은 컸다”며 “힘을 갖춰 북한의 야욕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 생각없이 어린 나이에 군대에 갔다가 비극적인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국민들은 이들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전쟁을 사전에 대비해 후손들이 피해를 입지않도록며 해야지요.”
김해=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