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의 ‘슈퍼 갑’인 대형병원들이 의약품 대금을 받아놓고 납품업체에 제때 지급하지 않은 채 ‘이자놀이’까지 하는 대금지급 관행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일부 종합·준종합 병원들이 약품납품 대금을 무려 19개월 뒤에 지급해 약품도매상이 흑자부도가 나는 등의 폐해가 빈발하자 국회와 정부가 오는 6월 국회에서 법제화를 통한 슈퍼 갑 횡포 차단을 적극 검토하고 있어서다. 남양유업 사태를 계기로 불거진 슈퍼갑 횡포 논란이 의료계로 번질 조짐이다.

툭하면 의약품 대금 늑장결제…'슈퍼 갑' 병원 횡포 막는다

○의료계 횡포 제동에 한목소리

오제세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실 관계자는 19일 “갑의 위치를 앞세운 대형병원들의 약값대금 지급 지연이 만성화돼 있는 데다 남양유업 사태 이후 사회적 문제의식도 커지고 있어 6월 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안’을 핵심법안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대형병원의 결제 행태를 납득할 수 없다”며 법제화를 통한 규제에 긍정적이다. 최근 여야가 각 상임위에 상정된 ‘갑 횡포방지법안’의 조기 처리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어 이 법안이 6월 국회에서 쟁점이 될 전망이다.

민주당 소속 오 의원이 지난해 12월 대표 발의한 ‘약사법일부 개정법률안’은 ‘병원이 의약품을 납품받은 날로부터 3개월 내로 대금을 지급하고 지급기한을 넘기면 연 이자 40% 이내에서 하루 단위로 이자를 계산해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입법의 1차 관문인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일부 의료기관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대금지급을 과도하게 지연시키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어 거래정상화를 위해 일정부분 법률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긍정 의견을 제시했다.

황의수 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급한 약값을 병원들이 수개월째 도매상이나 제약사에 지급하지 않는 관행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복지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의약품을 납품받은 후 결제까지는 평균 7개월이 걸리고 일부 준종합병원이나 의료원은 1년7개월 뒤에 대금을 지급하는 사례도 적발됐다. 현행 약품공급 시스템에서는 100침상 미만 병원은 제약사가, 100침상 이상은 도매업체가 의약품을 공급하도록 되어있다. 병원들이 사용 의약품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청구하면 심사 후 건강보험공단이 약값을 지급하고 병원은 다시 이를 제약사나 도매업체에 건네는 구조다.

병원이 의약품 대금을 청구하면 건강보험공단은 평균 30일 이내에 지급해준다. 문제는 의료기관들이 건강보험공단 재정에서 약품비를 받아간 뒤 이를 납품도매상이나 제약사에 곧바로 주지 않고 은행 이자놀이를 하거나 자체 운영비로 ‘전용’하는데도 아무런 제재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병원과 제약사·의약품도매상은 하도급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60일 이내 지급을 규정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이다.

○약값 받아 병원은 이자놀이

병원들은 대금결제를 늦춘 만큼 이득을 취하는 반면 도매업체들은 유동성 위기로 인한 부도 위기에 상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19개 도매업체가 부도가 났고 올 들어서도 지난달 말 연매출 100억원 규모의 프라임팜이 부도를 맞는 등 도매업체들의 도산이 이어지고 있다.

2011년 기준 건강보험에서 약품비는 13조4000억원. 이 가운데 의료기관으로 나간 금액은 31%인 4조2000억원에 달한다. 병원이 건강보험공단에서 약값을 받아 6개월간 대금을 쥐고 있는 경우를 가정하고 대출이자 5%를 적용하면 연간 1050억원의 부당이익을 취하는 셈이다. 이미 건강보험공단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대금지급을 늦출수록 병원 수익에는 도움이 된다.

한국의약품도매협회 관계자는 “보험공단에서 약값으로 받았지만 언제 줘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대금결제를 최대한 늦추면서 은행에 맡겨 놓고 이자놀이까지 할 정도로 ‘내맘대로 결제’”라며 “을 입장에서는 납품할 때 한 번, 돈 받을 때 한 번 등 최소 두 번 이상 통사정을 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국회가 법제화 움직임을 보이자 대한병원협회는 의약품도매협회가 참여하는 ‘태스크포스팀(TFT)’을 꾸려 대금 결제 자율선언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병원협회는 현행 약값 지급결제방식이 개선돼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법제화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방성민 병원협회 기획부장은 “병원계도 의약품 대금지급 지연문제의 심각성에 인식을 같이하고 제반노력을 하고 있다”며 “다만 당사자 간 자율적 노력과 합의에 기반한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원 측은 낮은 보험수가가 약값 지급결제 지연의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방 부장은 “법으로 이를 강제할 경우 지방 중소병원의 폐업 가속화로 국민건강권이 오히려 침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협회는 이번주 안에 의약품도매협회와 4인씩 참여하는 ‘약품대금 조기지급TFT’ 회동을 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도매협회 고위 관계자는 “슈퍼 갑과 절대 을이 만나 자율적 해법을 찾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대형 병원에 대한 강제력이 없는 협회가 실효성 없는 자율선언을 하자는 것은 법제화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고 반발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