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인의 세계] 승진하는 '관문'이지만…"처음으로 乙 체험"
정부부처에 ‘대변인(spokesperson)’ 제도를 처음 도입한 곳은 1998년 김대중정부 당시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변인은 정당과 청와대에서만 쓰였을 뿐 부처는 공보관이라는 직책을 썼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대변인직을 새로 만들고 김영재 증권감독원 국장(현 칸서스자산운용 회장)을 앉혔다. 이 전 위원장은 자신의 저서 ‘위기를 쏘다’에서 “공보관은 앵무새 같은 느낌이다.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대변인직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국장에게는 개혁을 위한 대국민 홍보와 금감위 조직을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보호할 방패 역할을 함께 맡겼다”고 밝혔다.

김 국장은 ‘첫 정부부처 대변인’ 기록에 맞게 순발력 있는 정보 수집과 판단능력, 걸쭉한 입심으로 금감위가 강력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며 외환위기를 헤쳐나가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기획재정부(옛 재정경제부)에서는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이 이름난 대변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2001년 진념, 2004년 이헌재, 한덕수 등 3명의 경제부총리를 보좌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2년여 동안 대변인을 맡았다. 노무현정부 시절 기획조정실장을 정책홍보실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각 부처 1급이 대변인을 맡도록 한 결과다.

그는 재정경제부가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매주 정례브리핑을 통해 각종 현안을 정확하게 알리면서 정책 마케팅의 기초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 전 실장은 “노무현정부 당시 언론과의 긴장관계가 형성되면서 각 부처의 대변인이 특히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역대 장차관 중 대변인을 거친 경우가 즐비할 정도로 우수 인재들을 투입했다.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12회·전 산업부 장관), 오영교 한국산업기술미디어문화재단 이사장(12회·전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해주 전 통상산업부 장관(6회)은 공보관 시절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최우수 공무원’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각 부처에서 대변인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뭘까. 전 상공자원부 공보관 출신으로 장관까지 역임한 A씨는 “공무원으로 줄곧 ‘갑(甲)’으로만 지내다 기자들을 상대하며 처음으로 ‘을(乙)’을 경험해봤다”고 말했다. 젊은 출입기자들에게 반말까지 들어가며 일을 하려니 처음에는 ‘두들겨 패고 사표를 써버릴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민원인들에게 ‘갑’으로 비쳐진 적은 없었을까를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공보관을 지낸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은 당시 몸에 익힌 ‘섬김의 자세’로 사장 5연임의 대기록을 세웠다.

대변인은 또 부처 전체의 시각으로 업무를 바라보면서 상황 판단과 분석 능력을 키우고 정책의 균형감각도 갖추게 된다.

외교안보부처는 보안이 중시되는 부처의 성격 때문에 ‘명대변인’이 나오기 어려운 부처로 꼽힌다. 그럼에도 통일부에서는 대변인이 대북메시지를 발표하는 얼굴이라는 점에서 핵심 요직 중 하나로 꼽힌다. 김남식 차관과 천해성 정책실장이 모두 대변인 출신이다. 천 실장은 2009년부터 약 3년간 대변인을 맡아 논리적이고 깔끔한 브리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심기/조수영/조미현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