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의 네 번째 장인은 동갑내기 극작가 유진 오닐
“뭐라고. 남자 나이가 쉰넷이라고. 아버지와 동갑이 아니냐.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극작가 유진 오닐은 딸 우나의 폭탄선언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명문 브리어리 스쿨(미국 내 최정상권의 기독교계 고교)을 나와 이제 막 영화배우로 데뷔한 딸이 갑자기 36세 연상의 찰리 채플린(1889~1977)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펄쩍 뛰고도 남을 일이었다. 게다가 채플린은 이미 세 차례나 이혼한 경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우나는 아버지의 의견을 무시한 채 기어코 채플린과 결혼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명 소설가였던 우나의 어머니 아그네스 불턴은 우나가 두 살 때 아버지와 이혼했고 그로 인해 우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랐다. 그런 아버지의 의사를 따를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진 오닐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거의 돌보지 않은 비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행세하면서도 배우가 되려는 우나가 도움을 요청했을 땐 소 닭 보듯 했다.

채플린이 우나 오닐(1925~1991)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영화 ‘그림자와 실체’의 여주인공을 찾고 있을 때 영화사 측에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면서였다. 동양적 순수함을 간직한 우나는 매혹적인 여성이었지만 채플린은 그에게서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여성적 매력이 그를 사로잡았다. 53세의 채플린은 영화 제작을 뒤로 미룬 채 17세 소녀와 로맨스에 빠져 들었다.

채플린은 우나를 자기 영화의 주역으로 캐스팅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자기 인생의 주역으로 캐스팅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우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 D 샐린저와 사귀고 있었다. 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나에게 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나는 편집증적이고 지나치게 심각한 샐린저보다 채플린의 유쾌함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채플린은 이듬해인 1943년 6월 우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어린 시절은 보낸 채플린은 늘 어머니처럼 따뜻한 여인의 손길을 그리워했다.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주말에도 혼자서 빈집을 지켜야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정에 목말라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뒤에도 그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복감으로 괴로워했다. 무수한 여인들을 만나고 세 번이나 결혼했지만 모성과는 거리가 먼 여인들이었다. 그런 그에게 느지막이 꿈에 그리던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채플린은 딸내미뻘의 우나에게서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그가 1964년 펴낸 자서전에서 “우나와의 결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고 술회한 점만 보더라도 채플린에게 있어 우나가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우울하게 보낸 우나 역시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적 행복을 그리워했다. 그가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에게 채플린은 따뜻한 아버지의 부성과 연인으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다가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채플린은 사상 시비에 휘말린다. 정치색이 짙은 작품들을 잇달아 제작한 데다 좌익 편향적인 태도가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거스른 탓이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감시가 계속되는 가운데 채플린은 1952년 가족을 이끌고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배 위에서 미국 정부가 자신의 재입국을 불허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채플린은 레만호가 내려다보이는 스위스의 코르지에 쉬르 베베에 새 둥지를 튼다.

채플린은 스위스에서 난생처음 아늑한 가정의 행복을 맛보게 된다. 우나는 항상 채플린 곁에서 뜨개질하며 남편의 조언자이자 말동무가 돼줬다. 그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는 그의 수족이 돼줬다.

우나는 1960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채플린과 한 번도 나이 차를 느낀 적이 없다면서 “그는 나의 세상이다. (채플린 외에) 다른 것을 본 적도 다른 것과 함께한 적도 없다”라고 말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에 만족한다고 강조했다.

1977년 채플린이 세상을 떠난 후 우나는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채플린이 없는 스위스는 너무 외로웠다. 그러나 고국인 미국에서의 생활은 외로움만 더해줄 뿐이었다. 결국 그는 스위스로 되돌아왔다.

1991년 9월28일 뉴욕타임스에는 ‘우나 오닐 채플린 66세로 사망: 명예의 그늘에서 살다’라는 추모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기자는 틀렸다. 우나는 채플린과 함께 만든 행복의 양지에서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