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휘말린 고인 유족에 배상 판결

국가는 고인(故人)이 과거사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반증하지 못할 경우 주변 정황에 따라 희생자로 추정되는 고인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17부(김용석 부장판사)는 정모씨 유족 4명이 제기한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총 1억2천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0일 밝혔다.

정씨는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가 전남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으킨 반란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된 뒤 6.25 전쟁 초기 군 헌병대에 넘겨져 살해됐다.

여수 시내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정씨는 반군 점령 당시 반장이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당했고 내란죄로 중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1950년 7월 숨졌다.

정씨 유족이 소송에서 이기는 데는 2년 가까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인과 과거사 희생자의 동일인 여부를 치열하게 다퉜기 때문이다.

1심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혀낸 '대구형무소 희생 사건' 희생자와 원고들의 사망한 부친이 같은 사람이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하지만 2심은 국가가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반증하지 못할 경우 정황에 따라 동일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원고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고인과 과거사위 결정문상 희생자의 이름이 같고 증인신문 결과 고인이 여순사건 직후 연행돼 돌아오지 못한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다"며 "고인과 희생자를 동일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재소자의 죄명, 형기, 본적과 주소 등이 적힌 자료를 영구 보존해야 한다"며 "이 자료를 보관하지 못한 국가가 동일인이 아니라고 객관적으로 반증하지 못하는 한 이 사건에서 배상 책임을 진다"고 덧붙였다.

법원 관계자는 "고인과 희생자의 동일인 여부가 쟁점이 되는 과거사 소송은 드물다"며 "추정에 따른 배상 책임을 벗으려면 국가가 객관적인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한지훈 기자 han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