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된 사랑…미소년 탐하다 파멸로 끝난 옥스브리지 남성들
검사가 물었다. “감히 입 밖에 내서 안 되는 사랑은 무엇인가.” 피고가 대답했다. “젊은 남자를 향한 나이든 남자의 사랑이다. 미켈란젤로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이다. 이보다 순수하고 깊이 있는 정신적 사랑은 없다. 지금은 사람들의 몰이해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랑이 돼 버렸다.”

1895년 4월26일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검찰 측 심문에 “동성애는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아름답고 고결한 애정 행위”라고 완강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영국사회에서 동성애는 여전히 가장 수치스러운 사랑의 유형으로 간주됐고 법으로 엄격히 금지됐다. 와일드의 주장은 사실상 자신의 동성애 혐의를 자백한 거나 다름없었다. 법정은 와일드에게 나이 어린 남자에게 선물을 주고 유인, 숙박업소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 탐미주의 문학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39세의 젊은 작가는 순식간에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와일드에게 불행의 씨앗을 제공한 사람은 케임브리지대 재학생이던 로버트 로스(1869~1918)였다. 당시 와일드는 부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점차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의 시를 읽고 반한 로스가 그를 동성애의 세계로 유인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17세였던 로스는 성적으로 매우 조숙했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밝혀 주위의 조롱거리가 됐다.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 그리스 남성의 정신적 사랑을 동경하던 와일드는 성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성숙한 로스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트린 사람은 1891년 만난 앨프리드 더글러스(1870~1945)였다. 옥스퍼드대 학생이던 그는 명문 퀸즈베리가 자제로 잦은 동성애 행각으로 부친을 고통에 빠트렸다. 더글러스는 와일드를 격정으로 몰아간 데 만족하지 않고 그를 동성애 매춘 굴로 인도했다. 와일드는 그곳에서 미소년들을 소개받았고 그들을 호텔로 데려가 정을 나눴다.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동경이 뜻밖에도 육체적 탐욕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러던 차에 1895년 2월18일 더글러스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은 와일드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채 회원제 사교클럽인 ‘알베말’에서 아들과 계속 만나는 것을 알고 웨이터에게 ‘오스카 와일드에게 남색 혐의를 제기하며’라고 쓴 명함을 건넴으로써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격분한 와일드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퀸즈베리 후작을 고발했다. 후작은 자신이 옳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 와일드의 뒤를 캐게 했다. 탐정들은 사창가에 잠입, 와일드가 소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증거들을 생각보다 쉽게 확보했다.

1895년 4월3일 재판이 열린 날 방청석은 이 세기의 재판을 보려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청중을 휘어잡은 것은 와일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승패는 이미 결정난 상태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결정적 증거들이 제시됐고 와일드는 당황해서 감정적 언사를 쏟아냈다. 결국 변호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와일드는 소를 취하하고 말았다. 퀸즈베리 후작의 승리는 곧 와일드의 파멸을 의미했다. 즉시 와일드 앞으로 동성애와 미성년 성추행 혐의의 체포영장이 청구됐고 2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형기를 마친 그는 도망치듯 영국을 빠져나와 파리에 거처를 정했다. 더글러스가 불행에 빠진 와일드와 파리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둘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두 사람의 가족은 송금을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더글러스는 영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파리에 혼자 남은 와일드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파리 중심가를 배회했다. 그는 곧 빈사상태에 빠지고 만다.

1890년 10월12일 런던에서 오랜 친구 레지널드 터너가 건너와 최후의 50일 동안 와일드를 보살폈다. 와일드를 동성애의 세계로 인도한 로스는 임종 하루 전날 도착했다. 로스는 신부를 설득, 와일드가 대학시절부터 그토록 바라던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병자성사(병을 앓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신자가 받는 성사)를 받게 했다. 와일드는 못다 쓴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두 친구의 배웅 속에 세상을 등졌다. 옥스브리지 남자들의 사랑은 그렇게 전설이 돼 버렸다.

1998년. 영국인들은 트라팔가광장 부근 아델라이드 거리에 와일드의 얼굴을 새긴 벤치 모양의 동상을 설치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잠시 그곳에 앉아 와일드에게 말을 건넨다. “세상에 감히 입 밖에 내서 안 되는 사랑은 없다네. 그대의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네”라고.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