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씨가 새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김용택 씨가 새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전국을 돌아다닌 엿장수였던 김용택 시인의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가족들 앞에서 총에 맞았다. 일제시대에 아버지는 북해도로, 어머니는 안양 방직공장으로 징용을 갔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한 부모는 김 시인을 낳았고 곧바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밤이 되면 누군가 아버지에게 손전등을 들이대며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어댔다. 그들이 돌아가면 아버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어린 김 시인에게 “너 같으면 어느 쪽이라고 대답했겠느냐”고 되물었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며 맑은 서정시를 써 온 김 시인의 굴곡 많은 가족사다. 그가 서정시를 벗어나 사회에 발언하는 시들이 담긴 신작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을 낸 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태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은 낡았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소시민이었지만 이념으로 편 가르기를 당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당파를 떠나 옳은 건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뭐라고 말하면 ‘너는 그럼 진보세력을 욕하는 거냐’고 공격하고…. 이념을 떠나 인간이 중심인 사회가 돼야 한다고 봐요.”

이 같은 시인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시가 ‘정면’이다.

‘어둠 저쪽에서 후래시 불빛을/얼굴에 들이대며/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정조준된 총구는/오랜 세월 나를 향해/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너희들 검지손가락 끝마디에 방아쇠는 늘 걸려 있다.’

비인간적인 이념뿐 아니라 인간을 소외시키는 일부 자본의 성격에 대해서도 비판한 그는 이번 시집을 내면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설렘과 수줍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키스는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오늘날 세계는 이를 원하는 입술을 강제적으로 빼앗는 비인간적 사회가 됐다”고 제목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 시인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많은 한국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교육이 문제”라고 했다. 어린 시절 처절하게 깨지고 좌절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정해진 방향으로 가도록 주입하는 낡은 교육 탓에 이런 모색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직장인들의 고통도 싫어하는 일을 하루 종일 하고 있는 게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찾지 못하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하찮은 가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특유의 서정성으로 시집의 나머지 부분을 채운다.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아무런 까닭 없이/남은 생과 하물며/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이렇게 외롭지 않다./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이 무한한 가치로.’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