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가 29일(한국시간) 텍사스주 어빙의 라스콜리나스CC에서 열린 미 LPGA 노스텍사스 슛아웃 4라운드 도중 드라이버샷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박인비가 29일(한국시간) 텍사스주 어빙의 라스콜리나스CC에서 열린 미 LPGA 노스텍사스 슛아웃 4라운드 도중 드라이버샷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박인비, 18번홀 통큰 '승부수'…"엄마 말 안듣고 해저드 질러갔어요"
“엄마가 18번홀 해저드를 피해 끊어가라고 했는데 이를 어기고 ‘2온’ 공략한 것이 우승의 원동력이었어요.”

1타차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던 미국 LPGA투어 노스텍사스 슛아웃(총상금 130만달러) 최종라운드 18번홀(파5). 박인비는 그린까지 210야드가 남아 ‘2온’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날 저녁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제가 이 홀에서 해저드에 빠질뻔한 장면을 보고 엄마가 전화하셔서 절대로 ‘2온’ 욕심 내지 말고 아이언으로 끊어서 공략하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박인비의 손에는 5번 페어웨이 우드가 들려 있었다. 앞에 나무가 가로막고 있었으나 ‘2온’을 시도했고 볼은 그린 앞 에지에 떨어졌다. 홀까지는 15야드밖에 남지 않았다. 추격자 시간다는 아이언으로 ‘2온’을 노렸으나 그린을 넘어갔다. 그의 세 번째 어프로치샷은 홀 3m 옆에 멈췄고 박인비의 칩샷은 홀을 1.5m가량 지나쳤다.

시간다는 회심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박인비와 공동선두를 이뤘다. ‘퍼팅의 달인’으로 소문난 박인비도 1.5m 내리막 버디 퍼팅을 앞두고 떨릴 수밖에 없었다. 박인비의 퍼터를 떠난 볼은 홀의 왼쪽 절반을 향해 똑바로 구르더니 홀속으로 사라졌다. 박인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짜릿한 1타차 역전승의 감격을 만끽했다.

박인비는 “18번홀에서 짧은 어프로치샷으로 공략하지 못한다면 버디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어머니의 말씀을 어기고 우드로 ‘2온’을 노려 버디를 만들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샷 컨트롤이 잘되는 날이었기에 내 샷을 믿고 과감히 공략한 것이 우승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7개 대회에서 3승…우승확률 42.8%

박인비, 18번홀 통큰 '승부수'…"엄마 말 안듣고 해저드 질러갔어요"
2타 뒤진 공동 2위로 출발한 박인비는 29일(한국시간) 텍사스주 어빙의 라스콜리나스CC(파71·6410야드)에서 열린 대회 마지막날 4언더파 67타를 쳐 최종합계 13언더파 271타로 시간다를 1타차로 따돌렸다. 올해 신설된 대회에서 초대 챔피언에 오른 박인비는 투어 통산 6승째를 챙겼다. 또 우승 상금 19만5000달러(2억2000만원)를 받아 통산 상금 610만8792달러(68억4000만원)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박인비는 올 시즌 7개 대회에 출전해 3승을 거뒀다. 우승 확률 42.8%다. 최근 18개 대회에서 5승을 수확했다. 박인비는 이번 대회에서 72홀 가운데 61개홀에서 ‘레귤러 온’에 성공하며 84.7%의 경이로운 그린 적중률을 과시했다. 또 3라운드 2번홀부터 이날 마지막홀까지 35개홀 연속 무보기 플레이를 펼쳤다.

가장 먼저 시즌 3승 고지에 올라선 박인비는 세계 랭킹과 시즌 상금, 올해의 선수 포인트에서 모두 1위를 달렸다. 평균 타수(69.5타), 그린 적중 뒤 퍼팅 수(1.707개)에서도 단연 1위다. 한국 선수가 한 시즌에 3승 이상을 거둔 것은 박세리(1998, 1999, 2001, 20002, 2003), 신지애(2009) 이후 세 번째다. 아직 20개 대회가 남아 있어 박인비가 박세리가 갖고 있는 한국 선수 시즌 최다승(5승)을 경신할지가 관심사로 부상했다.

◆시간다의 14, 15번홀 결정적 실수

지난해 유럽투어 상금왕과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한 시간다는 박인비를 맞아 초반 흔들림이 없었다. 박인비가 1번홀 버디를 잡고 시간다가 2번홀에서 보기를 하면서 첫 공동선두를 이뤘으나 시간다는 3번홀(파5) 버디에 이어 6번홀(파3)에서 5m 버디 퍼팅을 성공시키며 다시 2타차로 달아났다. ‘중거리 퍼팅의 귀재’ 박인비가 8번홀(파4)에서 6m 버디 퍼트를 집어넣자 시간다는 3m 버디로 응수했다. 10번홀(파5)에서 박인비가 그린에지에서 시도한 이글 칩샷이 홀 바로 옆에 멈춰 ‘탭 인 버디’를 하자 이번에는 1m 버디로 대응했다.

승부의 추가 기운 것은 14번홀(파4). 시간다가 친 드라이버샷이 나무 뒤에 멈췄고 140야드 지점에서 나무를 넘기려고 했으나 꼭대기의 나뭇가지를 맞고 떨어져 그린에 오르지 못하면서 ‘3온2퍼트’로 보기를 기록했다. 이어 15번홀(파4)에서는 160m를 남겨두고 친 7번 아이언 두 번째샷이 갑자기 불어닥친 뒷바람을 타고 그린 뒤쪽 해저드로 들어가면서 더블보기까지 범했다.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in)’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박인비는 오랜 기다림 끝에 ‘조용하게’ 1타차 선두로 올라섰다. 박인비는 “상대 선수의 경기가 잘 풀려 실수가 나오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14, 15번홀에서 기회가 왔다”면서 “보기를 하지 않고 스코어를 지킨 덕을 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 우승 퍼팅을 앞두고는 “퍼트를 못 넣어도 연장에서 하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했다”고 말했다. 시간다는 “14, 15번홀에서 실수를 했지만 세계 랭킹 1위 박인비와 함께 플레이한 것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박인비는 정말 대단한 선수”라고 말했다.

◆이지영, 18번홀에서 OB 세 차례 ‘수모’

마지막날 7타를 줄이며 맹타를 휘두른 박희영(하나금융그룹)은 합계 9언더파로 유소연(하나금융그룹)과 공동 4위를 차지했다. 김인경(하나금융그룹)은 합계 8언더파 6위, 최나연(SK텔레콤)은 합계 7언더파로 세계랭킹 2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와 공동 7위를 기록했다.

한편 이지영(볼빅)은 18번홀에서 OB를 세 차례나 낸 끝에 ‘더블파(양파)’인 10타를 치며 5오버파 77타를 기록, 합계 6오버파로 전날 공동 5위에서 공동 43위로 추락했다.

일문일답 "女帝의 캐디만 입는 '캐디빕' 지킬 것 … 곧 메인스폰서 계약"

“랭킹 1위 선수의 캐디만 입는 ‘캐디빕’(Caddie Bib·캐디가 입는 조끼)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박인비는 29일 미국 LPGA투어 노스텍사스 슛아웃에서 우승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에서 아쉽게도 퍼팅을 많이 놓쳤고, 마지막 라운드에서도 퍼팅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며 “타수차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이겨내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우승을 해내 내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을 만큼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인비는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뒤 기쁨과 자부심만큼이나 책임과 의무가 커졌다”며 “시합하기 전에 늘 인터뷰를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얼떨떨했는데 대회를 치르다 보니 응원해주시는 분도 더 많아지고 ‘이런 자리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랭킹 1위는 좋은 플레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이상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숫자라고만 생각해야겠다”고 했다.

LPGA투어에서는 랭킹 1위 선수의 캐디에게 별도로 초록색 ‘캐디 빕’을 입혀 예우를 해준다. 박인비는 “청야니 선수의 캐디가 약 100주 동안 입는 것을 보고 주변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다”며 “내 캐디인 브래드가 정말로 입고 싶어 했고 아버지도 지난주 기념 사진을 찍었다”고 캐디빕에 얽힌 사연을 공개했다. 그는 “이 캐디빕을 입은 캐디의 선수는 정상에 있는 선수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동기 부여도 많이 받는다”며 “캐디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매 대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인비는 그러나 “아직 완벽한 1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1~2년은 더 노력하면서 지켜봐야 한다”며 “골프는 변수가 많아 매주 우승할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 라운드에 우승 기회를 갖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는 “신지애, 최나연 선수 등은 오래 꾸준히 쳐왔고 저는 이제 2년 정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서 “아직 보여 드릴 것이 많고 쌓아가는 중인 만큼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댈러스 한인타운이 이번 대회장에서 13㎞밖에 떨어지지 않아 교포들의 열띤 응원을 등에 업은 박인비는 “대회 기간 중 네 차례 한인타운을 방문해 한식도 먹고 빵집에서 요구르트도 먹고 책도 사며 구경했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조만간 메인스폰서 계약을 할 예정이어서 겹경사를 맞을 전망이다. 박인비는 “매니지먼트 회사(IB스포츠)에서 (메인스폰서에 대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공개했다. IB스포츠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과 계약이 임박했다”고 전했다.

코치 겸 약혼자인 남기협에 대해서는 “세심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며 “올해는 12월까지 스케줄이 꽉 차서 (결혼은)내년 말쯤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계획을 밝혔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