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산업단지. 오는 5월 완공을 앞둔 일본 NEG의 유리기판 공장 건설 현장엔 덤프트럭과 레미콘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드릴 소리에 옆 사람 얘기가 안 들릴 정도지만 주민들의 민원은 거의 없다고 한다. 주변 아파트의 한 주민은 “정적이 감돌던 곳인데 요즘은 활력이 생겨 오히려 좋다”며 “공사를 하는 기업들이 주민들에게 편의시설을 지원하고 있어 별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기업 전용공단인 당동단지는 휴전선과 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리적 단점 때문에 작년까지만 해도 입주율이 30% 정도에 불과했다. 인근 월롱단지에 액정표시장치(LCD) 세계 1위인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이 들어섰지만 당동단지는 2005년 공단을 조성한 지 7년이 넘도록 24만㎡(7만2400평) 부지가 비어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작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일본 기업들이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전문기업인 이데미쓰고산이 2600만달러를 들여 지난달 공장을 완공했다. NEG는 작년 5월부터 5억달러를 들여 유리기판 공장을 짓고 있고 지난달부터 4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추가 공장 건설에도 착수했다.

NEG는 LG디스플레이와 합작 설립한 유리기판 가공 업체 PEG(파주전기초자)에 들인 돈을 합하면 15억달러가량을 당동단지에 투자했다. 국내에 진출한 해외 기업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NEG나 이데미쓰고산 모두 일본 외의 지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처음이다.

2008년 이전에 이곳에 들어온 코템, 알박 등을 합하면 5개 일본 디스플레이 관련 기업들이 휴전선 앞 공단을 택한 셈이다. 그동안 일본 기업들은 경북 구미나 부산 등에 공장을 주로 지어왔으며 경기 북부 지역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민우 경기도청 투자진흥과 사무관은 “최근에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을 때 이곳에 입주한 기업들을 상대로 파악해 봤는데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분위기였다”며 “일본 기업들도 이제는 안보보다 경제논리를 우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의 파주행을 자극하는 것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는 OLED다.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생산되는 OLED 패널을 바탕으로 LG전자는 지난 18일부터 세계 최초로 OLED TV 생산에 나섰다.

유리기판 업계의 구조 변화도 ‘탈(脫)일본’을 재촉하고 있다. 유리기판은 박막회로(TFT)를 앉히는 얇은 유리로 전체 패널 가격 중 20%를 차지한다. TV 크기인 유리를 신용카드 두께보다 얇게 만들어야 하는 기술력 때문에 미국 코닝과 일본 아사히글라스, NEG, 아반스트레이트 등 4개 업체가 시장을 나눠 갖고 있다. 최근 LCD 가격이 떨어져 패널을 만드는 한국과 대만, 중국 업체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리기판 업체들은 50% 안팎의 영업이익률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기업들이 유리기판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LG화학과 중국 이리코, CNBM 등이 유리기판을 만들기 시작하자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국과 중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LG화학이나 중국 업체들이 유리기판을 대량 생산하게 되면 미국과 일본 업체들의 한국 및 중국 현지 진출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정성택/정인설 기자 naiv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