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10억원대 차명계좌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언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57·사진)이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그동안 고위공직자들이 상대방 비방 등 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적은 있었지만 실형 선고를 받고 법정구속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지적이다.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2단독(판사 이성호)은 허위 사실을 공표해 사자(死者)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조 전 청장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성호 판사는 “피고인이 언급한 계좌를 거액의 차명계좌라고 볼 수 없다”며 “막중한 지위와 책임이 있는데도 경솔한 태도로 허위 사실을 공표해 실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조 전 청장이 차명계좌로 지목한 청와대 행정관 두 명 명의의 시중은행 계좌를 분석한 결과 ‘거액의 차명계좌’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검을 권양숙 여사가 막았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명예훼손 의도가 없었다’는 조 전 청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발언으로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유죄로 인정할 수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사는 30여분간 길게 이어진 양형 이유 설명에서 공직자로서 조 전 청장의 책임에 대해 언급하며 강한 어조로 그를 훈계했다. 이 판사는 “피고인의 발언은 국론을 분열시켰고 피해자는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며 “허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발언의 근거를 공개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말했다. 이어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들었다고만 하는 것은 허위 사실 공표보다 더 나쁜 행위”라며 “법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 측에 직접 사과한 적도 없으면서 언론이나 법정에서만 ‘사과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조 전 청장은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31일 청 소속 기동대장 400여명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바로 전날 10만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권 여사가 이를 감추려고 민주당에 특검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 내용이 보도되자 노무현재단은 그를 사자 명예훼손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지난해 9월 조 전 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 6일 검찰은 징역 1년6월을 구형했다.

조 전 청장의 구속으로 전직 경찰청장들이 잇따라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경찰은 가라앉은 분위기다. 앞서 강희락 전 경찰청장은 건설현장 식당(함바) 브로커로부터 청탁과 함께 억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6월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최기문 전 경찰청장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택순 전 경찰청장은 각각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성호 판사는 '의대생 성추행' 사건 등 판결 내리며 피고인 훈계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법정구속한 이성호 판사(46·사법연수원 27기·사진)는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2001년 배우 윤유선 씨(44)와 결혼해 화제가 됐다. 그는 앞서 다른 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을 법정에서 ‘훈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판사는 지난해 8월 ‘고려대 의대생 동기여학생 성추행’ 사건으로 실형을 받은 배모씨(26)와 그의 어머니 서모씨(52)에 대해 여학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명예훼손)로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배씨 등은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자 피해자의 평소 대인관계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허위 문서를 교내에 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이 판사는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딸 가진 부모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라. 반성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에는 자신의 딸을 왕따시킨다는 이유로 딸의 동급생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판결 선고를 유예하며 선처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