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칙 기반한 합의가 사회통합의 길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사회적 균열(social cleavage)을 해소하는 일이다. 지난 대선 결과가 여실히 말해주듯이 지역, 이념, 세대를 경계로 사회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시민사회가 다원화될수록 사회적 균열이 더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으로 심화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와 달리 정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고, 다양한 집단과 계층의 이해와 욕망을 수렴해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더 이상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다원적 이해를 통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성원들 간의 합의를 통한 민주적 ‘정치’의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택시법 논란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회가 택시업계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택시법을 만든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감안해 지원할 경우, 다른 교통수단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고, 적지 않은 비용문제도 발생한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리라.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택시기사의 월수입이 150만원도 안되는 택시업계의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원칙과 현실이 함께 만족하는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 정치의 모습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이해와 입장의 충돌을 ‘공정(fairness)’의 관점에서 고민했던 학자가 존 롤스이다.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이해관계자가 개별적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에 합의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예컨대 특정 업계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결정할 때, 특정 업계를 고려하지 말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부터 원칙적으로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국민이 동의하는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원칙에 대한 공감이 있을 때 국가정책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담뱃세 인상 논란도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를 포함한 정부 일각에서는 급격한 담뱃세 인상을 통해 흡연율을 낮추자고 주장하지만, 실제 많은 수의 서민층 소비자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정부는 흡연율 저하를 명분으로 흡연자들에게 ‘징벌적 과세’라는 여운을 남길 수 있는 담뱃세 인상의 기존 논의를 경계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먼저 원칙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담뱃세 인상 정책을 추진해 나갈 때 예상되는 난항은 불을 보듯 명확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흡연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 담뱃세를 대폭 인상해 흡연율을 기대하는 수준만큼 감소시키겠다는 정책적 발상은 지극히 맹목적이면서도 순진한 생각이다. 흡연자는 범죄자가 아니라 납세자인 국민이자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뱃세 물가연동제 등과 같이 담뱃세 인상에 따라 담배 소비자들이 정책에 대한 충격과 거부감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 비중있게 논의돼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원칙이 타당한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없을 것이다. 사회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원칙 설정이 가능하다. 성숙한 사회는 그런 원칙을 고민하고, 가능한 한 많은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원칙을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가 살아나고 정치의 가능성이 실현된다.

개별적인 사안에 집착하기보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새 정부가 주장하는 국민통합도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인정(recognition of difference)’ 속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으로 봐야 한다. 원칙을 통한 합의를 만드는 일에 새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한다.

최영진 < 중앙대 교수·정치학 yjchoi@ca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