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소고기 사먹자고 인생 살아서야 …
소년이라는 말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소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그러나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색한 이 존재들은 경계의 산물이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연약하되 정신적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어른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요즘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시골 마을 노인네가 탄식하듯 말꼬리를 이어가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한순간 꿰뚫어버리는 코너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서울대학 가면 뭐하노, 좋은 데 취직하겠제, 좋은 데 취직하면 뭐하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제. 어이없게도 대개의 경우 인생의 대미가 ‘소고기 사먹겠제’로 끝나는 이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온다면, 이런 것이다. 아이가 자라 소년이 되겠제, 소년이 되면 뭐하노, 또 빨리 어른이 되라고 성화겠제, 어른이 되면 뭐하노…뭐 하긴, 소고기를 사먹을밖에.

소년이라는 말 속에는 이 허망한 인생의 파노라마가 함축돼 있다. 그래서 그 말은 늘 어느 정도 슬프고 애잔하며 씁쓸하다. 이미 어른이 돼버린 자들은 안다. 소년들이 고작 ‘소고기를 사먹자’고 치러내야 할 인생의 격전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를. 그것은 무수한 풍랑과 느닷없는 노략질에 맞서는 대모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스페인계 캐나다인 얀 마텔이 쓰고 중국계 미국인 감독 이안이 만든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이 엄혹한 진실과 마주서게 한다. 스스로를 ‘파이’라 자처하는 인도 소년이 부모와 형제를 잃고 망망대해에서 ‘리처드 파커’라 불리는 호랑이 한 마리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일단 이 단순한 구도를 몇 시간 동안 손에 땀이 나도록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영상미가 압도적이다. 소년과 호랑이는 번번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스스로의 영역을 지켜나간다. 때로 폭풍이 오고, 또 때로는 드물게 황홀한 밤바다의 신비가 펼쳐진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소년은 용기와 신념, 그리고 타자와 공존하기 위한 타협을 배워나간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대로다. 소년은 이 여행 끝에 육지에 다다르고 성숙한 어른이 될 것이다. 비록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선물이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불과할지라도 소년이 보여주는 이 심오한 인생 드라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그런데, 얀 마텔과 이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묻는다. 우리로 하여금 이 대가 없는 인생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고작 ‘소고기’가 주어지는 이 삶, 그 무의미한 삶에도 불구하고 이 지루한 항해를 버텨내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이 소설과 영화에 따르면, 그것은 ‘이야기’다. 파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가혹한 시련을 이야기의 힘에 의지해 돌파해 나간다. 이 서사물의 마지막에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와의 동고동락은 소년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소년은 그가 겪은 일이 사실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몫임을 분명히 한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자신은 그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를 표류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구명선에 탄 사람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의 현실 가운데 어머니를 잃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기 위해 그 자신 역시 타인을 향해 끊임없는 적의의 화살을 날리지 않으면 안 됐던 그 참상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파이는 지옥을 순례했다. 모든 소년 역시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소년의 숙명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 그들은 지옥의 유황불을 통과하는 의례를 거쳐야 한다. 그들에게 뚜렷한 무기가 있을 턱이 없다. 어설픈 작살 몇 개와 구명보트 따위로는 게임이 안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 소년들에게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무한하고 광대한지 보여주었다. 파이를 지켜준 것은 전 우주가 공동제작하고 출연한 이야기였다. 소년의 신은 바로 이 우주가 협연한 이야기의 광대무변함인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는, 있기, 없기? 있다.

신수정 <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ssjj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