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75·사진)는 장애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 살 때 찾아온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 등에 업혀 등하교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납북됐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경기고 입학이 거부돼 서울고에 진학,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3학년 때인 만 19세에 고등고시(9회·현 사법시험)에 합격, 1960년 최연소 판사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김 후보자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만약 법관이 된다면 독점기업 등 강자의 횡포로부터 보다 많은 약자를 돕는 데 애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판사 시절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1961년 5·16 직후 군사정부의 ‘병역 미필 공직자 추방’ 방침에 따라 지체장애로 군대를 안 갔다는 이유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법조출입 기자들이 문제를 제기, 판사직을 유지했다.

2년 뒤인 1963년엔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된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했다.

1994년 헌법재판소 소장에 올랐다. 국회 임명동의안이 통과되자 지팡이를 짚고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헌법이 살아 움직이는 생활규범이 되도록 하겠다”고 인사했다. 재직 시절 과외 금지, 군 제대자 가산점제, 택지 소유상한제, 동성동본 금혼 조항에 대한 ‘소신 위헌 결정’을 내렸다.

김 위원장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대에 따라 국민의 법의식도 변한다. 법은 그 의식에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법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법치와 관련, “법은 우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인 시절 내내 국어사전을 끼고 다녔다. “판결은 그 자체로 완벽해야 하는데,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그 안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참고서였다”는 것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신문을 봤다고 한다.

그는 작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영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게 문제”라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산을 물려주는 건 보장해야 하지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연 소득 8800만원 이상(소득세법 개정 전으로 지금은 3억원 초과 구간이 신설됨)은 모두 비슷한 세율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라며 “더 많이 버는 사람은 세율을 더 높이고, 세금을 전혀 안 내는 저소득층도 조금씩 세금을 내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경제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2000년 헌재 소장에서 물러난 이후 정치권과 거리를 둬왔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중앙선대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고, 대선 이후엔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고 있다. 헌재 소장으로 처음 공개한 재산은 29억9200만원(1994년)이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