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신의 예물 중에 상아 조각이 하나 있었다….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면 남녀관계의 동작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으로… 인조가 마침내 깨부수어 버리라고 명했다. 신하들 중에 손에 쥐고 감상하는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일을 비판해 그 사람의 청로(淸路)를 막아버렸다.’ 17~18세기 학자 박양한이 매옹한록이란 책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실학자 이규경도 두견석으로 조각하고 자작나무 갑에 넣은 것을 직접 보니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고 전했다. 당시엔 이 같은 조각을 춘의(春意), 그림을 춘화(春畵)라 했다. 선사시대 암각화, 청동기시대 인물상, 신라 토우 등에 등장하는 다산(多産)이나 주술적 의미의 성(性) 표현과는 달리 색정을 자극하려는 의도를 지녔다.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다. 이런 외설적 그림과 조각이 중국에서 본격 유입된 건 조선 중기 이후였다.

중국 춘화는 왕실에서 태자에게 성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됐다 해서 ‘춘궁도(春宮圖)’라 불렸다. 다양한 체위와 기교 위주다. 귀족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떠돌던 춘화가 민간에 퍼진 시기는 명대 후기다. 상품경제 발달로 향락문화가 고개를 들며 원앙비보(1642년) 같은 노골적 채색목판화집까지 간행됐다. 일본에선 에도막부 이후 도시 발달과 함께 춘화가 민간으로 파고 든다.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에 갔다온 신유한은 해유록이란 여행기에서 ‘일본 남자들은 품속에 운우도(雲雨圖)를 넣고 다니며 성욕을 돕는다’고 했다. 대담한 소재를 세밀하게 묘사한 게 특징이다.

한국 춘화는 중국 일본과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화가들이 나름대로 격조를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 성애 장면을 표현하면서도 배경에 남자와 여자를 상징하는 자연을 그려넣는 식이다. 남녀간 결합이 자연의 음양이치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해학이 곁들여진 그림도 많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춘화 15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에서 오는 15일부터 열리는 ‘옛사람의 삶과 풍류-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전에서다. 낙관이 없는 전칭(傳稱)작들이긴 하나 단원의 운우도첩에 실린 5점은 매끈한 붓질로 당대의 성풍속을 농염하게 표현했고, 혜원의 건곤일회첩에 수록된 10점도 수위가 약한 대로 춘정(春情)이 물씬 묻어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풍속화가 김준근의 미공개작 50여점과 김득신, 윤두서 등의 풍속화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춘화 15점은 ‘19금’이다. 하드코어 포르노가 범람하는 요즘 조선시대 춘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