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는 철저한 애국적 사고를 한 창의적 부자인 동시에 전략적 경영자입니다.”

최해진 동의대 교수(사진)는 ‘경주 최부자의 탄생과 400년의 신화’라는 주제발표에서 최부자 가문을 이같이 표현했다. 그는 1대 최진립(1568~1636)부터 12대 최준(1884~1970)으로 이어지는 12대 최부자 가계 분석을 통해 “시대를 앞선 창의적 경영을 통해 모은 재산을 자기 식구들의 개인적 치부에만 사용하지 않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 장자 중심의 조선시대에 재산을 장자에게만 나눠주지 않고 둘째 이하의 아들이나 딸, 심지어 서자에게도 비율에 따라 골고루 배분했다는 게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라고 손꼽았다. 또한 자녀들을 불러모아 상속 재산에 대해 분쟁하지 않기로 하는 서약서인 화해기(和解記)를 작성해 모두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초기 재산 형성은 3대 최국선(1631~1682)부터다. 최국선은 철저히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을 재산 관리의 기본으로 삼아 부를 축적해나갔다. 1만석 이상을 쌓지 않으려는 가훈 때문에 일정량 이상이 되면 소작인에게 분배하는 현대식 인센티브 제도를 채택해 소작인들의 근로 의욕 증대는 물론 흉년이 잦은 당시 토질이 좋은 논을 구입할 수 있는 정보를 소작인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4대 최의기(1653~1722)는 ‘사고팔 때 제값을 주고 사고, 제값에 적정하게 팔라’는 상거래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5대 최승렬(1690~1757)에서 11대 최현식(1854~1928)에 이르기까지 부자로서 덕을 행하는 참부자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1884~1970)은 광복 후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에 전 재산을 바쳤다.

최 교수는 “12대에 걸친 최부자 재산 형성 과정의 공통점은 시대 상황을 잘 읽어나가며 남보다 앞선 경영과 가치를 실현한 데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