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 박 당선자는…22세 퍼스트레이디 38년만에 '퍼스트' 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게 됐다. 그의 자서전(‘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등)과 각종 인터뷰, 언론보도, 측근들의 이야기 등을 종합해 그동안 박 당선자가 걸어온 길을 재구성했다.

○고무줄놀이 잘하던 골목대장

박 당선자는 6·25전쟁 중이던 1952년 2월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은 재혼으로 35세, 중등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는 초혼 27세였다. 1958년 신당동 집으로 이사했으며, 그해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유년 시절 박 당선자는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등을 두루 잘하는 골목대장이었다.

아버지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쿠데타를 위해 박정희가 집을 나설 때, 10살 박 당선자는 안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함께 청와대로 옮겨야 했으나 여동생 근령과 함께 신당동 집에서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머니 육영수가 자식들이 일찍부터 특권의식을 가질까봐 우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학창시절엔 얌전하고 성실하며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성심여중, 성심여고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고교 3년 동안은 결석이나 지각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엔 단짝 친구들을 청와대로 부르기도 했다. 박 당선자의 방을 둘러본 친구들은 “근혜 너 공주처럼 살 줄 알았는데…”라며 실망스러워했다.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산업역군이 돼 국가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역사학과를 가길 희망했던 어머니를 설득시켰다. 당시 캠퍼스는 아버지 박정희가 추진한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시위가 고조되고 있었다. 한번은 “박정희 물러가라”고 데모하다 퇴교당한 과 친구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뒤 어머니에게 부탁해 복교와 취직을 돕기도 했다. 미팅이나 연애는 못해봤다. 본받고 싶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남자선배는 있었다. 박 당선자에게 애정공세를 펼치던 남학생도 있었다. 다 잘 되진 못했다.
[박근혜 시대] 박 당선자는…22세 퍼스트레이디 38년만에 '퍼스트' 되다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됐다”

박정희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던 1974년, 박 당선자는 평점 3.82(4.0 만점)의 학점으로 이공계를 수석 졸업한 뒤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저격 소식을 듣고 짧은 유학생활을 끝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

그때부터 박 당선자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꿈 등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그렇게 ‘퍼스트레이디’의 삶이 시작됐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박 당선자는 사망한 어머니의 역할을 조금씩 대신해 나갔다. 매일 아침 박정희와 식사하면서 조간신문을 보며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는 퍼스트레이디 역할 수행에 대해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박정희는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최태민 목사를 만나 ‘새마을 운동’을 벌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아버지의 저격 소식을 들은 박 당선자의 첫마디는 “전방에는 이상 없습니까”였다. 계엄령이 선포됐다.

1979년 11월엔 근령과 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갔다. 짐은 트렁크 6개로 조촐했다.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됐다. 27세였다.

○은둔의 생활 18년…“덧없는 인간사이다”

18년간 은둔의 생활이 시작됐다. 박 당선자는 아버지 사망 후 돌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서울의 한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낸 모씨와 만나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박 당선자를 모른 척했다. 이날 밤 박 당선자는 일기를 썼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 이후 박 당선자는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점점 더 숨었다.

1980년대 박 당선자는 주로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일을 드문드문 했다. 1980년 4월 박정희가 설립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물러났다. 2년 뒤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 무렵 사촌오빠 박재홍(국회의원)이 박 당선자에게 결혼을 권했으나 그는 “오빠, 이제 그 소린

하지도 마세요”라며 단박에 거절했다.

1990년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여동생 근령에게 넘겼다. 1994년엔 정수장학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가 2005년 물러났다.

○정계입문…‘선거의 여왕’이 되다

정계입문의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나중에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입당했다. 이듬해 4·2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군에 투입, 국회의원이 됐고 이곳에서 내리 4선을 했다.

박 당선자는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을 요구하며 이회창 당시 총재와 대립했다. 결국 2002년 2월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석 달 뒤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면담했다. 6개월 후엔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졌고 차떼기 수사, 노무현 탄핵 등의 역풍을 맞았다.

2004년 4월 총선을 한 달 앞두고 박 당선자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뽑혔다. 그는 대표 취임 직후 서울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당사로 삼았다. 전국을 다니며 진심으로 반성하겠다고 호소해 121석을 얻었다. 덕분에 한나라당은 기사회생했고, 그는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이후 3년 동안 야당 대표로 지냈다. 각종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중 서울 신촌에서 ‘커터칼 테러’로 오른쪽 뺨이 11㎝ 찢겼다. 병원에 도착한 박 당선자는 “대전은요?”라며 선거 판세를 물었다. 그러나 치열했던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5년간 대립과 협력을 오갔다.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측근들이 우르르 낙천하자 ‘친박연대’가 등장했고 박 당선자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면서 울분을 토했다. 2011년엔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또 수세에 몰리자 박 당선자는 구원투수로 다시 등장했다.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고 지난 4월 총선에서 이겼다. ‘이명박계’는 사실상 와해됐고, 넉 달 전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