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대로변 S빌딩. 건물 1층 커피숍 앞에 주차를 위한 정지대가 박혀 있고 승용차 7대가 세워져 있었다. 커피숍에 도착한 40대 남성이 차에서 내려 대기하던 현장 직원에게 발레파킹(대리주차 서비스)을 맡겼다. 차도와 보도 경계 턱에는 차들이 보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볼라드(말뚝) 6개가 박혀 있었지만 차들은 1㎝ 정도의 횡단보도 턱을 통해 인도로 올라왔다. S빌딩 앞은 이런 식으로 주차된 차들로 거의 ‘점령’된 상태였고, 보행자들은 승용차를 피해 지나갔다.

#2. 같은 날 저녁 신사동 인근 C영화관. 시민들이 걸어다니는 영화관 앞 폭 4m 인도에 20㎡ 크기의 ‘노천 카페’가 설치돼 있었다. 카페엔 테이블 6개와 의자 13개가 놓여 있었다. 영화를 보러온 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영화관 입구 왼쪽엔 화단과 주차원이 대기하는 천막 1동도 세워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개인 소유 빌딩의 주차공간이나 카페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곳은 건축법상 ‘공공(公共)의 공간’으로 쓰이도록 규정된 ‘건축선 후퇴공간’이다. 사유지이지만 시민들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도로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공공용도로 개방한다는 조건으로 건축 허가가 난 곳이다. 이런 건축선 후퇴공간은 울타리나 계단, 화단, 주차장 등으로 사용할 수 없다. 광고물 설치도 안 된다.

그러나 본지 경찰팀 취재 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 대부분의 건축선 후퇴공간은 보도와 건물 사이 공간에 테이블을 놓고 음식점·카페 영업을 하거나 임시 주차 장소로 사용돼 오히려 보행자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1층 사업자가 물건을 쌓아둔 곳도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1962년 건축선 후퇴공간이 건축법에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원래 취지와 달리) 대부분 사적인 공간으로 전용돼온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건축선 후퇴공간이 불법 전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단속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건물주들이 소유권을 강조하며 사유지임을 주장하면 단속할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관할 관청도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제대로 단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의 공간’이 주차장·노천카페로

건축선이란 건축물의 벽이나 담이 도로로 넘어오지 않도록 그은 도로 외곽의 경계선이다. 건축선 후퇴는 현행 건축법상 건물이 들쭉날쭉하게 들어서는 것을 막고 보행자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건축선에서 0.5~3m 뒤로 물러나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서울시의 도시계획조례에 따르면 보통 차도와 보도를 합쳐 20m 이상의 도로가 있는 곳은 도로변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미관 지구’로 지정되는데, 미관 지구 내 건물은 건축선에서 3m 뒤에 세워야 한다. 서울 시내 미관지구의 총 연장은 678㎞로, 전체 도로의 8.32%를 차지한다.

그러나 서울 시내 대부분의 건축선 후퇴공간은 도입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건물주의 주차장이나 야외카페 등 사적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이날 기자가 둘러본 서울 문래동 도림로 일대 인도는 차량이 몰려들면서 행인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꽉 막혀 있거나, 옷·화장품 가게 앞에 상품을 쌓아둔 곳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서울 시내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강남의 최대 번화가인 테헤란로처럼 잘 지은 빌딩 내에 지하주자창까지 제대로 갖춰진 곳은 건물 앞 인도 정비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다. 하지만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건물 앞 인도가 주차장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서울시뿐만 아니다. 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 등 전국 대부분의 대도시가 1.5~3m의 건축선 후퇴공간을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경기 성남시의 경우 분당·판교신도시의 ‘테라스 카페 거리’도 관할 관청인 분당구청과 건물주들이 공공공간 내 테라스 영업을 놓고 6년이 넘도록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사유지 침해” 반발, 관할 관청은 속수무책

건축선 후퇴공간이 본래 취지에 맞게 공공 공간으로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공간이 사유지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올해 시내 건축선 후퇴공간 2만439곳을 점검, 건물주에 의해 불법 전용되고 있는 934곳을 적발했다. 건물 앞에 테라스나 판매대를 설치해 영업행위를 하거나 주차 공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900여건이 넘는 적발 사례 중 아직도 강남과 한남동·이태원동 등지의 500여곳은 시정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실토했다.

건물 1층 상점들의 경우 행인들을 상대로 한 영업활동이 가장 활발하기 때문에 단속하려는 관청과 상인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단속을 해도 제대로 시정되지 않는 이유다. 서울 압구정동 커피전문점의 이모씨(47)는 “비싼 월세에 세금까지 내고 장사하는데 무작정 단속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대로변 상권은 차를 갖고 찾아오는 손님 비중이 큰데 그걸 다 막는다면 장사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최막중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는 “공공성이라는 건축선 후퇴공간의 목적을 생각할 때 항상 비워놓기보다 노천카페 등을 운영하면 사람들이 즐겁게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주차 공간으로 쓰이는 것은 막되 사람이 모이고 활용할 수 있는 기능이 수행되도록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내 곳곳에 건축선 후퇴공간이 있지만 이 공간이 불특정 다수 시민이 편하게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시민이 별로 없다는 점도 건축선 후퇴공간의 도입 취지를 겉돌게 한다. 서울 이태원에 있는 회사로 매일 출근하는 송모씨(30)는 “회사 앞 길을 걷다 보면 차들이 건물 앞으로 차를 대겠다고 인도로 다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며 “불편할 때가 있지만 건물 앞 주차가 불법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전문가, ‘강력 단속’& ‘합리적 조정’ 엇갈려

전문가들은 철저한 단속으로 위반행위를 뿌리 뽑거나 건축선 후퇴공간에 관한 정책을 보다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선 후퇴공간은 건축법상 ‘공공의 공간’으로 쓰이도록 규정된 것인 만큼 당연히 다수 시민에게 돌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며 “건축선 후퇴공간을 정비하지 못하면 도시 미관은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실제 강력한 단속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곳도 있다. 서울 서초구는 지난해 말부터 강남대로와 동작대로 등 11개 간선도로 84.52㎞에서 ‘간선도로변 건축선 후퇴공간 일제 정비’를 실시하고 있다.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 관내 656개 사업장의 불법 시설물을 정비해 88%의 정비율을 기록했다. 차량의 인도 통행이 예상되는 곳에는 볼라드를 설치해 차량 진입도 원천 봉쇄했다. 진익철 서초구청장은 “건축선 후퇴 규정을 위반한 곳은 200만~300만원의 이행강제금까지 부과하고 있다”며 “일각에서는 ‘표 떨어지는 정책을 왜 쓰느냐’는 얘기도 하지만 이 문제를 방치해두면 도시 미관 정비는커녕 시민들의 법질서 의식도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송파구는 현실을 감안, 공공성보다는 상권 활성화에 무게를 두고 건축선 후퇴공간의 개념을 다소 완화해 시행하고 있다. 석촌호수 남쪽 1.1㎞ 구간의 카페 건축선 후퇴공간 내 테라스형 데크 설치를 허용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인 데다 보도 너비에 비해 보행자들이 적은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한 건축 전문가는 “건축선 후퇴공간 불법 점유처럼 피해자가 명확하게 특정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법제도를 완화시키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