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위기의 의미를 아시나요.”

독일인인 유르겐 쾨닉 한국머크 사장은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 중 정확한 한국어로 ‘위기’를 발음했다. 기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이자 기회(機會)라는 뜻이죠.” 5일 서울 대치동 한국머크 본사에서 만난 쾨닉 사장은 경기 전망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받아 넘겼다.

세계 67개국에 4만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글로벌 제약·화학기업인 머크의 지난해 매출은 15조원 규모다. 1989년 한국에 진출해 의약품과 액정, 기능성 안료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쾨닉 사장은 “위기의 진정한 의미는 2008년과 2009년 한국이 가장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

2008년 한국머크 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당시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나라로 기억했다. “위기에 되려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했고 오히려 녹색성장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위기에서도 같은 모습입니다.”

머크는 한국에 대한 이런 확신을 바탕으로 지난해 10월 경기도 평택 포승 첨단기술센터 내에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응용개발연구소를 열었다. 독일 본사의 OLED 연구소 구조와 똑같이 설계된 이 연구소는 독일 외 지역에 지어진 최초의 OLED 연구소다.

쾨닉 사장은 “한국은 항상 첨단 기술과 연결돼 있고 신기술 개발 트렌드를 이끌어 간다”며 “세계 박람회에서 가장 먼저 전시되는 OLED TV는 한국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R&D(연구개발) 시설을 갖춰야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따라갈 수 있다”며 “한국이 머크의 전략 국가 중 하나가 된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이런 기업들과 함께 제품을 개발해야 성장하고 그 성과로 다시 한국에 재투자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2010년 미국 바이오업체 밀리포아 인수 후 머크는 한국 내 사무실을 늘렸고, 지난해 연구소 개설 이후 화학 관련 생산시설들도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다.

쾨닉 사장은 내년 사업계획과 더불어 머크가 설립 350주년을 맞는 2018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더 높은 효율성과 차세대 성장 엔진을 갖추는 것이 350주년을 맞는 머크의 자세”라며 “한국 머크의 운영에도 이를 반영해 의약품, 바이오 기술, 실험실용 화학물질 분야는 물론 액정과 태양광, OLED 등 신기술 분야에서 성장 동력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쾨닉 사장은 2009년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달력을 만들어 전 세계에 보내고 있다. 그는 이날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내년도 머크 달력을 소개했다. 매년 달력의 작가를 선정하고 제작하는 데만 18개월간 공을 들이는데, 내년 달력은 김지혜 작가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김 작가는 조선시대 책가도(책과 서가 등을 소재로 한 민화)나 화조화, 산수화 등의 이미지를 오늘의 감수성으로 재구성해 은은하게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달력은 독일 본사를 비롯해 세계 67개국 머크 지사에 배포돼 한국을 알릴 예정이다. 쾨닉 사장은 달력이 우리 주변에 늘 있고 매일 본다는 점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숫자와 그림만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으니 한국과 예술가를 알리는 데 이처럼 적합한 것이 없다”며 “달력으로 한국 미술을 알리는 작업이 국내 문화예술 발전에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668년 설립돼 344년간 명맥을 이어온 머크는 창업자 가문인 머크가(家)가 13대째 경영권을 쥐고 있다. 현재도 주식의 70%는 머크 가문이 보유하고 있다.

쾨닉 사장은 머크가 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독일 국내총생산의 80%가 중소기업에서 나오는데 이들 대부분은 가족기업”이라며 “독일에서 가족기업은 아주 강력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소개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