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즐겨 읽는 책 중의 하나가 고전이다. 가방끈이 짧아 아직 오경(五經)을 모두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읽는 습관은 겨우 재미의 문턱을 넘은 듯싶다. 오늘은 학교에 출근하면서 문득 전에 읽었던 예기(禮記)가 떠올랐다. ‘학기(學記)’편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이다.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써 발전한다’는 뜻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 그것이다. 이 말은 한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초등학생도 외우고 다닐 정도니, 나름 국민 사자성어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우리 교육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혹자는 그것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말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삶을 끝내는 학생도 한둘이 아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신이 문제풀이 기계에 불과하다고 강변하는 학생도 있다.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할 청소년기가 온통 불행하다면 과연 학교는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교육환경은 나날이 선진화되고, 교과목은 복잡다단해졌다. 한국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문제 해결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마냥 기뻐해야 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스펙 쌓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더 좋은 중고등학교,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스펙 말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채워주려고 하는 어른들의 그릇된 욕망과 또한 가득 채워야 행복할지 모른다는 학생들의 잘못된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이 확실히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볼 때 교학의 본질은 학생에게 나날이 채워주는 것에 있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자신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우선 기업이 나서서 학력 차에 따른 임금 격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것은 성인이 됐을 때의 삶의 질 때문이다. 둘째, 국가는 사회적 합의하에 대학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순수한 학문 공동체로서의 대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전제로, 교육당국은 학교에 대폭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 지역 특색을 살리고, 학생별 맞춤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다음으로 학부모도 진정 자녀를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게 해야 한다. 경쟁 속에서 하루를 피마르게 보내는 것과 비움으로써 행복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 그 어느 것이 좋은지는 스스로 깨닫게 할 필요가 있다.

비우는 것은 허(虛)가 아니라 ‘겸’(謙)이다. 지금 학교는 학생에게, 학부모에게, 그리고 교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지 채우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학(敎學)이 아니다. 교학은 비우는 것이다.

이준순 < 서울교총 회장 ang66666@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