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여파로 일제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던 1920년대. 영화를 통해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을 위로한 연예인이 있었다. 영화 ‘아리랑’으로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춘사(春史) 나운규 선생이다. 24세에 각본·감독·배우 ‘1인3역’을 맡아 당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선생은 110년 전 오늘 함경북도 회령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터 유랑극단 구경을 즐기던 평범한 아이로 성장기를 보냈다. 신흥보통학교에서 극단을 만들어 연기를 했지만 취미 수준이었다. 1918년 입학한 명동중학교가 폐교한 뒤 만주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회령~청진 간 철도 폭파 미수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생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생계를 위해 유랑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동갑내기 배우 안종환의 소개로 한국 첫 영화 회사인 조선키네마에 들어갔다. 영화 ‘심청전’의 심 봉사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연기를 하며 틈틈이 연출을 익힌 선생은 1926년 무성영화 ‘아리랑’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이듬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옥녀’ 등 20여편의 영화를 쏟아냈지만 수익은 변변치 않았다. 영화사 문을 닫고 일본 영화사 작품에도 출연했던 선생은 1936년 최초의 발성영화 ‘아리랑3’으로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1년 뒤 내놓은 ‘오몽녀’까지 히트시켰지만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35세로 요절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