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7년 한참 빚에 쪼들리던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집에 또 한 명의 가정부가 들어왔다. 헨드리케 스토펠스(1625~1663)라는 시골처녀였다. 첫 번째 부인인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후 헤르트헤 디르크스라는 미망인이 아들 티투스의 유모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혼자서 집안일까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사관의 딸이었던 스토펠스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살림의 대가족 틈바구니 속에서 웬만한 궂은일은 안 해본 게 없는 보기보다 강인한 처녀였다. 게다가 이 처녀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풍만한 몸매를 지닌 매력덩어리였다. 렘브란트의 마음이 거친 성격의 디르크스에게서 이 처녀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렘브란트는 디르크스에게 전 부인인 사스키아의 보석을 제3자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부인 못지않은 예우를 해주고 있던 터였다.

렘브란트는 스토펠스를 자주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 처음에 스토펠스에게 호의적이었던 디르크스는 점차 질투심을 갖게 됐고 급기야 적대적인 감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사태는 화가 난 디르크스가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가면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혼자 살던 디르크스는 생활고를 못 이겨 렘브란트로부터 받은 패물을 저당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렘브란트를 법원에 고소했다. 렘브란트가 자신과의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결혼을 하든가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디르크스에게 렘브란트가 매년 200굴덴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단 디르크스에게는 패물을 저당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디르크스는 이 조항을 어기고 사스키아의 패물을 저당 잡히고 말았다. 분노한 렘브란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디르크스에 대해 불리한 증언들을 수집, 디르크스를 유치장에 처넣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스토펠스는 정식은 아니지만 사실상 렘브란트가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게 됐다. 시골에서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로서는 암스테르담 최고 화가의 반려자가 됐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스토펠스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은 간음한 여인이라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그에게 잘해줬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전 부인 사스키아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렘브란트가 결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산을 상속했기 때문이다. 화가와 처녀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교회는 스토펠스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그를 교회에서 추방했다.

더 큰 시련은 렘브란트의 파산이었다. 밖에 나갔다 하면 값나가는 물건을 하나씩 사들고 오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화가를 뜯어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어오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았다. 스토펠스가 렘브란트 집에 들어온 후에도 빚은 계속해서 불어났고 결국 브레스트라트의 저택이 경매에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스토펠스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티투스와 함께 화상을 설립하여 렘브란트를 자신들의 피고용인으로 등록, 렘브란트가 이 점포를 통해서만 그림을 판매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해서 렘브란트는 빚쟁이의 등쌀에서 벗어나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고 재무상태의 악화도 막을 수 있었다.

스토펠스는 신이 말년의 렘브렌트에게 내린 복덩이였다. 그가 없었다면 렘브란트 후기 명작의 탄생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펠스가 렘브란트에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천재 화가에 대한 존경심 못지않게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곤 하던 철부지 어른이었지만 이 세상에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은 무엇보다도 렘브란트가 그를 여러 차례에 걸쳐 작품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데서 잘 드러난다. ‘침대 위의 여인’이나 ‘멱 감는 여인’에서 화가는 그를 관능적인 여인으로 묘사했고 ‘플로라’에서는 신화 속의 여신으로, ‘목욕하는 밧세바’에서는 구약성서 속의 매혹적인 여인으로 묘사했다.

안타깝게도 스토펠스가 렘브란트에게 선사한 안락한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63년 스토펠스는 38번째 생일날 렘브란트의 곁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렘브란트는 이제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가난하고 힘없는 노인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음의 위안을 준 것 중의 하나는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었다. 1669년 가을, 노화가는 늙은 가정부의 잔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자화상을 그렸다. 그 표정 속에 서린 진한 우수, 그것은 스토펠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