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락이라는 통보가 정식으로 왔습니다.”

2008년 5월8일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 참석했던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공항 라운지에서 대기하던 중 서울의 비서실로부터 자신의 해임 사실을 보고받았다. 2007년 3월 임명된 지 1년2개월 만이었다. 임기 3년의 절반도 못 채운 때였다. 다음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박 회장은 비서실 직원이 가져온 문서 한 통을 건네받았다.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명의로 된 서한이었다. ‘금융기관장 적격성 평가에서 탈락했다’는 짧은 내용이 전부였다.

박 회장은 ADB 총회 출국 전에 이미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다. 박 회장의 증언. “이사회에 조용히 사표를 낼테니 결과만 미리 알려달라고 금융위원회에 요청했었다. 미국 증시에도 상장된 우리금융의 경영진을 정부가 대놓고 자르는 건 회사의 대외신인도나 정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금융권에서 대대적인 인적 청산을 시작했다. 국책은행과 공기업 사장, 감사는 물론 우리금융지주처럼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의 주요 경영진들은 모두 재신임 대상이었다. 청와대는 이들로부터 일괄 사표를 받고, 선별수리 방식으로 물갈이 작업을 벌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인적 청산

2008년 ADB 총회에 참석했던 금융기관장들의 운명은 미묘하게 엇갈렸다. 윤용로 기업은행장은 마드리드에서 전광우 금융위원장으로부터 재신임 통보를 받았다. 박대동 예금보험공사 사장과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은 귀국 후 ‘생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면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연임 불가’라는 언질을 받고 아예 ADB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양천식 수출입은행장, 홍석주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김규복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한이헌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조성익 증권예탁결제원 사장도 모두 교체 대상으로 분류됐다.

우리금융지주의 경우 박 회장만이 아니라 박해춘 우리은행장, 정경득 경남은행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등 산하 3개 은행장도 모두 경질됐다. 비(非)상장사인 우리·경남·광주은행장은 즉각 경질과 함께 후임 인선 전까지 부행장 대행체제로 가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다. 우리금융 고위 관계자의 증언. “정태석 행장은 사표를 내지 않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며 반발해 박 회장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정부가 대주주의 권한을 앞세워 주총에서 해임을 결정하면 잔여임기 동안의 연봉도 못 받는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전원 사표, 선별수리’ 방침이 금융권에 알려지면서 구명을 위한 로비와 사표 제출 순서를 둘러싼 눈치작전도 벌어졌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의 증언. “각 금융회사 경영진들이 적절한 사표 제출 타이밍을 찾기 위해 수시로 연락을 해왔다. 발 빠르게 먼저 낼 경우 연임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내면 끝까지 버텼다는 인상을 줘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권 공신들 ‘자리 나눠먹기’

인적 청산의 창구는 부처별 차관급이 맡았지만, 작업을 주도한 곳은 청와대였다. 장관조차 산하 공기업 경영진에 대한 인사추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청와대가 정권 출범 초기 이처럼 금융 공기업 경영진에 ‘일괄 사표’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가며 인적 청산을 시도한 이유는 뭘까.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2008년 7월 국회에서 “공공기관장의 일괄 사표는 정치적 재신임 차원”이라고 말했다. 강 장관은 “업무 성과, 전문성, 경영자로서의 역량 등을 참작해 유임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금융권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임에 성공한 인사와 경질된 인사 사이에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금융공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증언. “일괄 사표를 받아놓고 정권교체에 기여한 공신들에게 ‘자리를 나눠줄테니 찍어봐라’는 식이었다고 들었다. 경영상 하자나 개인 비리에 의한 경질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명박 정부의 인사 코드는 ‘나눠먹기’였다는 지적이다.

2008년 3월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대한 ‘낙하산’ 실패가 대대적 인적 청산의 발단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임기 만료로 물러난 이영탁 이사장의 후임 인사를 위한 공모엔 9명이 지원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이 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우리투자증권 사장 출신의 이팔성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현 우리금융지주 회장)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과는 보나마나’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 대표는 최종 후보 3배수에도 들지 못하고 탈락했고 새 정권의 ‘낙하산 인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이후 청와대가 기강 확립 차원에서 금융권에 대한 ‘군기잡기 인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거래소에 대해선 검찰 수사는 물론 감사원·금융감독원 조사까지 이뤄졌다. 2009년 1월에는 재정부가 한국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해 정부의 예산 통제와 감사원 감사를 받도록 했다. 결국 신임 이정환 이사장은 2009년 10월 임기를 절반이나 남기고 사퇴했다. 진동수 당시 금융위원장이 이 이사장을 설득한 결과였다.

금융권 물갈이에서 핵심적 기준은 ‘코드’였다는 점을 청와대도 부인하지 않는다.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이 대통령도 ‘대통령과 장관, 하위 공직자의 생각이 같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전 정부에서 업무의 전문성보다 정권과 코드가 맞는 사람을 임명했다면, 이들과는 같이 갈 수 없는 것 아닌가. 특히 정연주 KBS 사장처럼 이전 정부 출신들이 주요 기관장으로 버티면서 국정운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특별취재팀=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
mbnomics@hankyung.com

■ 엽관제

엽관제(獵官制ㆍspoil system)는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 후보가 주요 관직을 노획한다는 뜻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철학을 공유하고 있거나, 선거과정에서 도움을 줬던 인사를 공직에 발탁하는 인사제도다. 정치역정을 함께 한 동지가 정부 내 주요 자리에서 일하면 당선자가 국정 운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정실주의 인사로 흐를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정당정치가 발달한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됐고, 특히 미국에서 성행한다.

한국은 직업공무원제를 채택해 공무원의 신분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공직이 논공행상의 제물이 되거나 이로 인해 국가행정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대통령은 장·차관(급) 이상 정무직을 포함해 5급 이상 공무원과 정부가 경영권, 또는 지분을 소유한 공공기관장 및 임원, 각 부처 산하기관장에 대한 법적 임명권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관련 단체나 민간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실질적인 인사권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