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국민 사이에선 ‘경제의 혈액’인 돈이 제대로 안 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정도 차는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돈맥경화(credit crunch)’ 현상이다. 특히 양적완화를 추진하는 유럽과 미국에서 이 현상이 심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더 많이 고민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지표가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의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고성능 화폐·high-powered money)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의 현금 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처럼 기준금리가 변경되지 않을 때는 현금 보유 성향과 지급준비율이 낮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의 양적완화 정책 등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본원통화 증가에 비하면 총통화의 증가, 즉 신용 팽창 규모는 위기 전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유럽, 일본, 영국, 캐나다 등 선진 5개국의 통화승수(광의통화÷본원통화)는 위기 이전의 10배에서 현재는 5배 안팎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한국의 통화승수도 25배에서 22배로 하락했다. 지표상으로는 선진 5개국에 비해 아직까지 하락폭이 크지 않지만 그동안 한국 경제의 활력이 매우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국민이 체감하는 하락 폭은 그 이상이다. 특히 금융회사로부터 소외당하는 서민과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방기업일수록 더 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돈맥경화 현상이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요인은 계속된 위기로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디레버리지(deleverage·부채축소와 저축증대)에 여념이 없는 가계는 빚을 내서까지 소비할 여력이 없고, 기업도 투자를 꺼리게 된다. 대부분 글로벌 금융사들의 대출 태도가 금융위기 이후 깐깐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모든 정책은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큼 부작용이 발생한다. 돈맥경화 현상이 풀리지 않자 금융시장에서는 ‘역설(paradox)’이나 ‘수수께끼(conundrum)’라는 말로 표현되는, 종전의 이론이나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경제학의 혼돈시대(chaos of economics)’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이 ‘트리플A’에서 떨어졌고 추가 강등 경고가 잇따르는 속에서도 국채가격은 상승(국채수익률 하락)하는 ‘미국 국채의 역설(T-bond’s paradox)’을 들 수 있다. 그동안 경기를 예측하는 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해 왔던 장·단기 금리 격차(수익률 곡선)가 최근 들어 실효성과 예측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맥경화로 인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도 시중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으면 증시에서 기대하는 ‘유동성 랠리’는 오기 힘들다. 오히려 특정 시점에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줄어들면 퇴장하거나 부동화됐던 돈이 순식간에 시중에 방출되면서 글로벌 증시와 부동산 시장에는 거품이 끼게 된다.

경기 면에서도 돈맥경화로 중앙은행에서 풀린 돈이 실물경제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발부터 썩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부자와 대기업보다 서민층,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방기업일수록 어려움을 호소하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이달 들어 발표된 선진국의 양적완화 정책은 가능한 한 유동성 공급을 줄여 정책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드라기 총재가 발표했던 ‘무제한 채권 매입’은 스페인과 같은 재정위기 발생국이 발행한 국채를 ECB의 발권력을 동원해 사주되 풀린 돈은 환수하겠다는 불태화(sterilization)와 연계시킨 ‘재정적자 화폐화’ 방안이다.

버냉키 의장이 들고 나온 ‘무제한 양적완화’에서 ‘무제한’이라는 것은 1, 2차 양적완화 때와 달리 규모와 기한에 있어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다. 드라기 패키지와 달리 풀린 돈은 회수하지 않겠다고 해 증시에서 더 반기고 있지만 버냉키 패키지의 행간을 읽어보면 ‘무제한’이란 용어만큼 돈을 풀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결국 선진국들이 양적완화 등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아직까지는 시중에서 돈이 돌고 있지 않다. 또 9월 이후 실시된 양적완화 정책에서는 중앙은행이 푸는 유동성 규모를 종전보다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증시에서 돈의 힘에 의해 주가가 올라간다는 ‘유동성 랠리(liquidity rally)’ 주장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