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불황에 애플과 싸움 여파까지…내년 반도체 투자 줄인다
삼성전자가 내년 반도체 투자를 줄이기로 했다. 글로벌 불황이 계속되면서 수요가 살아나지 않고 않는 데다 애플의 주문이 줄어들 가능성도 커지고 있어서다. 삼성전자가 보수적인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다른 대기업들의 움직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동수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은 19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년 시황이 좋지 않은 것은 이미 인지된 사실이어서 투자 규모를 보수적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전 사장은 “IT(정보기술) 투자는 시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지금은 내년도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 단계로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내년도 어둡다”

삼성이 투자 축소를 검토하는 것은 불황과 그에 따른 수요 부진 때문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에 1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뒤 상반기에만 9조7000억원을 쏟아부었다. 1분기 메모리 생산라인 2개를 시스템반도체 라인으로 바꿨으며 지난 6월 화성에 시스템반도체를 만드는 17라인을 짓기 시작했다. 8월엔 미국 텍사스 오스틴공장의 메모리 라인에 대해서도 전환공사를 시작하고 이달 12일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기공했다.

공격적 투자의 결과, 이들 라인이 완공될 내년 말부터 생산량은 늘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도체 시황은 최악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초 가까스로 1달러 선을 회복했던 D램(DDR3 2Gb) 값은 지난달 말 6개월 만에 다시 1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3분기가 통상 IT 성수기지만 올해는 PC 구매가 살아나지 않고 있어서다. 모바일 기기에 주요 쓰이는 낸드플래시도 올 들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서 가격이 34%나 폭락했다.

내년 전망도 어둡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는 지난 12일 중국 시안공장 기공식에서 “내년 반도체 업황도 획기적인 개선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우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삼성전자는 라인 전환과 신설 등 투자가 많았다”며 “지금처럼 PC 수요가 살아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서원석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내년 반도체 투자액은 올해보다 10~20%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애플, 주문 더 줄이나

애플과의 관계 악화도 삼성전자가 투자를 축소하기로 한 배경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올해 예정된 15조원의 투자 중 9조원 이상을 시스템반도체에 투입하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전부 삼성전자에 의존해 왔다.

애플은 또 아이폰,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낸드플래시 모바일D램 등도 삼성 제품을 주로 써왔으나 아이폰5 초기 물량 1500만대에선 완전히 배제했다. 모바일AP도 TSMC 등으로 조달처를 다변화할 움직임이다.

수십년째 지속돼온 메모리 업계의 치킨게임이 끝난 것도 투자 축소 원인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메모리업계에선 올 2월 업계 4위인 일본 엘피다가 파산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도시바 등 3~4곳만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 공격적 투자로 쓸데없는 경쟁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대기업 전전긍긍

글로벌 불황의 여파가 미치는 곳은 반도체뿐만 아니다. 이 때문에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대기업그룹은 예년보다 빨리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에 나서고 있다. 상황이 워낙 불확실해서다. 확률이 떨어지는 전사 차원의 계획보다 사업부별로 계획을 세우는 곳도 있고, 일부 그룹은 연간 경영계획보다 분기 반기별로 대응해 나가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가장 많은 투자를 해온 삼성전자가 보수적 투자 계획을 밝힌 것은 재계의 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