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자프로골프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보호와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저대회인 제34회 메트라이프·한국경제 K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정희원(21·핑)은 영 딴판이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전북 익산에서 혼자 골프백을 메고 서울로 와 레슨을 받았다. 밤에는 찜질방과 친척집을 전전했다. 프로가 된 뒤에도 후원사가 없어 중고골프클럽을 구입해 써야만 했다. 2년 전까지 대회장에 갈 때도 택시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부모님은 골프클럽 이름도 몰라

초등학교 때 유도 선수로 활약했던 정희원은 어느 날 코치가 골프 쪽으로 전향하는 바람에 덩달아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코치(강천구 현 KPGA세미프로) 선생님이 ‘유도는 돈을 못버니까 내가 골프를 배워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자격증을 따려면 오래 걸리잖아요. 저도 동네 연습장에서 골프를 시작했죠. 아빠도 그때 박세리 선수가 우승하고 멋있어 보이니까 골프를 해보라고 했고요.”

전주기전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교수였던 부친 정영주 씨(60)는 정희원의 언니, 오빠 학비를 대기에도 벅찼다.
“아빠는 저에게 해준다고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지요. 제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부모님들은 골프채 이름도 몰랐어요. 너무 말이 안 통해 속상했지요. 다른 선수들은 부모님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전 아예 방치됐어요.”
그는 “샷이 문제가 있어 레슨을 받고 싶다고 하면 아빠는 ‘정신력이 문제’라는 식으로 치부했다”며 “1부 투어에 와보니 선수들이 전문 트레이너에다 체계적인 레슨을 받던데 그걸 보면서 정말 다르구나 하고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시상식 땐 부모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갑자기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스치고 지나가니까 울컥했지요. 그래도 아빠가 골프로 번 돈을 배우는 것에 투자하라고 해주셔서 고마웠어요.”

◆기차 타고 상경해 레슨 받아

정희원은 이명훈 KPGA프로에게 스윙의 기초를 다졌다. “태국 전지훈련에서 만난 이 프로님이 ‘너 골프 잘 치겠다. 소질이 있다’며 그냥 가르쳐줄테니 서울로 배우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1주일에 한 번씩 익산에서 기차 타고 서울 용산에 있는 연습장으로 갔지요. 스윙이 안정되면 한 달에 1~2번 정도 갔고요. 잠은 찜질방에서 자거나 2시간 떨어진 고모집을 오가며 잤어요.”

그는 2년 전까지 언니와 함께 버스와 택시를 타고 대회장을 찾아다녔다. 1부 투어 선수가 되면 후원사도 생기고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제가 국가대표 출신도 아니고 몸매가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 성적까지 안 좋으니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더군요. 무척 힘들었어요. 대회에 들고 나갈 클럽이 없어 익산 골프숍에서 중고클럽을 사서 나가기도 했죠.”
지난해 마지막 대회인 ADT챔피언십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제가 지난해 커트 탈락은 딱 한 번만 했어요. 꾸준하게 성적을 냈지만 시드전을 다시 치러야 했지요. 특히 마지막 대회인 ADT챔피언십 마지막 홀에서 보기만 안 했더라도 시드전에 안 갈 수 있었는데. 대회 직후 시드전이 열리는 무안으로 가면서 정말 의지할 곳이 하나님밖에 없더라고요.”

◆기 죽지 않고 신앙으로 이겨내

그는 투어 선수로 바닥을 경험했다. “다른 선수들은 부모님들이 골프도 잘 알고 배경도 있어 여기저기 후원도 받고 레슨도 잘 받는데, 그런 걸 보면서 어린 마음에 힘이 들었어요. 부모님은 제가 스폰서가 없다고 하소연하면 ‘네가 볼을 못 치니까 없는 거지’라고 해서 속상해 울기도 했죠.”

그러나 그는 “절대로 기는 안 죽었다”고 했다. “기가 죽으면 진다고 생각했거든요. 남에게 절대로 힘든 얘기를 안했어요. 신지애 언니는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지만 저는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골프 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죠.” 그는 데뷔 이후 경험을 보약으로 여긴다. 4년간 시드전을 오르락내리락한 것도 아마추어 시절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수도 해보고 꼴등도 해보고 그런 것이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죠.”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힘들 때마다 신앙으로 이겨냈다고 했다. “여름에 서산의 언니 집 근처 교회 수련회에 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왔어요.”

그는 “예쁘고 잘 치는 선수들이 많아야 투어 인기가 올라가지만 하위권에 있어보니까 힘든 선수들이 많던데 후원하는 분들이 아래도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돈이 없어서 못 배우는 것은 서럽잖아요. 저의 우승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면 좋겠어요.”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