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의사들 돈보다 '삶의 질' 중시…마취·방사선·진단의학과도 선호
'고위험·중노동' 외과·흉부외과 썰렁…저출산으로 산부인과·소아과 찬밥
마취과 전문의 강모씨(37)는 지난 6월 수도권의 한 대형병원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척추전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병원은 응급실이 없어 야간 근무가 없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칼퇴근’한다. 강씨는 요즘 저녁마다 가족과 함께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1주일에 사흘은 영어학원에 다니고 주말엔 암벽등반 교육을 받는다.
서울 A대학병원에서 진단의학과 레지던트(전공의)로 근무하고 있는 한모씨(29·여). 한씨는 작년까지 다른 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로 근무했다. 하지만 밤낮 이어지는 야근에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겹쳐 1년간의 경력을 버리고 전공을 바꿨다.
의대생들의 전공 선호도가 급변하고 있다. 요즘은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과 ‘마방진(마취과·방사선과·진단의학과)’이 뜨고 있다. 1990년대부터 고액 연봉의 대명사로 불렸던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을 위협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최고 인기 과였던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과 비교된다. 메스(수술용 칼)를 잡는 진료과의 인기가 떨어진 반면 정시 출퇴근이 가능한 과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젊은 의사들 사이에 ‘삶의 질’을 중시하는 풍조가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2012년 전공의 모집 현황’에 따르면 정신건강의학과(옛 정신과)는 162명 정원에 271명이 몰려 167.3%의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 지원율만 놓고 보면 압도적인 1위다. 재활의학과(125.2%), 영상의학과(128.7%) 등도 정원보다 월등히 많은 의사가 몰렸다. ‘마방진’의 경우 각각 정원의 92.1%, 100%, 87.2%를 확보했다.
2003년 방사선과와 진단의학과가 각각 정원의 45%, 37.2%를 확보한 것에 비하면 10년 만에 두 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반면 수술이 많은 흉부외과는 지난해보다 정원을 줄였는데도 60명 모집에 25명만이 지원, 41.7%의 저조한 지원율을 보였다. 외과·산부인과·비뇨기과 등도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심지어 경북대병원 부산대병원 등의 흉부외과에서는 전공의 지망생이 한 명도 없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외과계열 선호 현상이 심했던 서울대병원은 올해 전공의 모집 결과 6명 모집에 10명이 지원한 재활의학과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 반면 외과·흉부외과·산부인과·비뇨기과는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의대생들이 과거 ‘의료계의 꽃’으로 불렸던 수술 전공(흉부외과·외과·산부인과 등)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강북에 있는 한 병원 영상의학과에 근무하는 전문의 이모씨(34)는 “리스크가 큰 외과계열 전공보다 안정적이고 위험 부담이 낮은 과를 선택하는 게 대세”라며 “경기 불황으로 개업의 대신 월급쟁이 의사를 선호하는 현상도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의료수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전공 간 수입 격차가 크게 줄어든 것도 이 같은 추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연세대 의료복지연구소는 ‘적정 의사인력 및 전문 분야별 전공의 수급 추계 연구’를 통해 2015년 재활의학과·정신과·성형외과·피부과는 20% 이상 공급 과잉이 빚어질 전망인 반면 흉부외과·외과·이비인후과·산부인과는 공급 부족이 심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힘들고 어려운 진료과를 피하는 의사가 많아지면 특정 분야 의사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시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게 의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