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고아원을 짓기 위해 연 거예요. 앞으로 공연도 해서 돈을 더 모을 생각이고요. 세계 각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 불쏘시개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1970년대 명콤비 ‘서수남과 하청일’의 서수남 씨(69·사진)가 아프리카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키다리 아저씨가 돼 돌아왔다.

9월10일까지 충무아트홀 갤러리에서 열린 ‘뷰티풀 라이프 인 아프리카’는 그가 지난 3년간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자원봉사하면서 찍은 사진을 내건 전시회. 까만 눈동자의 우간다 어린이, 초원의 야생동물 등 70여점의 사진이 남다른 눈길을 끌었다. 그는 “3년 전 장애아동 복지시설인 은평천사원의 홍보대사를 하면서 우간다와 인연을 맺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우간다 현지에서 사진을 찍으며 겪었던 웃지 못할 일화도 털어놨다. 산업스파이로 오인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3시간 더 들어가면 진자라는 데가 있어요. 나일강 상류인데 댐이 있죠. 댐 위에 있는 새들에 앵글을 맞췄는데 총을 든 군인이 다짜고짜 여권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산업스파이로 알았나봐요. 2시간 넘게 길에서 승강이를 하다가 겨우 여권을 찾아서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1000장 가까이 되는 사진은 모두 지워야 했고요.”

1969년 ‘서수남과 하청일’ 콤비로 데뷔해 ‘팔도유람’ ‘동물농장’ ‘과수원길’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그가 사진가로 변신한 것은 인생관이 달라졌기 때문. 1990년부터 시작한 노래교실 사업을 통해 당시 돈으로 한 달에 적게는 5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까지 벌었다. 그렇게 신나게 돈을 번 것도 잠시. 2000년 9월 아내가 그의 전 재산을 날리고 잠적해버리는 사건이 터졌다. 그에게 남은 건 10억원에 이르는 빚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뿐이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 좌절과 절망만 남더라고요. 몇 번 죽으려고 했다가 어머니의 한마디에 힘을 얻게 됐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죠.”

그는 “이제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5년 전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삶을 즐기기 위해서다. “특별한 계획이요. 없어요. 사진 찍고, 여행 다니고, 봉사하고. 그게 다죠. 참, 11월 말에 충무아트홀에서 제 오랜 팬인 블로그 이웃들을 위해 공연을 하며 연말을 보낼 생각이에요.”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