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그녀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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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서 만난 어느 취업준비생
프로필 보여준 손길엔 간절함이
풍요로워도 청춘의 고통 똑같아"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프로필 보여준 손길엔 간절함이
풍요로워도 청춘의 고통 똑같아"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며칠 전 서울에 나갈 일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출근시간이 막 지난 때라 빈자리도 있었고 한결 시원해진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엔 여유와 생기가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직업 탓인지 지하철을 타면 제각각 다른 표정과 옷차림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개별적인 삶을 상상해보거나 뭘 하는 사람일까 추리해보기도 한다. 특이한 상황을 목격하기라도 하면 이걸 어떻게 소설 속에서 써먹어볼까 머리를 굴리기도 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읽는 책이나 신문을 몰래 훔쳐보는 이상한 버릇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로 자꾸 눈길이 갔다. 대학생인 듯한 그녀는 출력한 문서를 무릎에 올려놓고 머리를 수그린 채 푸른색 펜으로 첨삭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고뇌와 몰입의 강도가, 원고를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열 번째 퇴고를 하고 있는 소설가의 그것과 비슷해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별표와 밑줄로 장식해놓은 단어들이 제발 날 좀 봐달라고 간절히 외쳤기 때문일까. 훔쳐본 바 문서의 내용은 어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지원서이거나 면접을 대비한 예상질문과 답변서처럼 보였다. 자신의 장점과 남다른 소질이 센 단어들로 표현돼 있었다. 가자미눈을 하고 그것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나는 이윽고 그녀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학생. 있잖아.
화들짝 놀라기라도 했는지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았다. 어린 사람들이 모두 예뻐보이는 건 나이가 든다는 표시일까. 나는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만큼 사회성이 풍부한 사람이 못된다. 이 오지랖이 나의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기왕 불렀으니 몇 가지 의견을 들려주었다. 물론 소곤소곤.
학생. 내가 회사 입장이라면 지원자 스스로 창의성과 재능과 열정이 있다고 무작정 주장해놓은 지원서보다는, 구체적인 과업을 들어 학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는 게 더 호감을 줄 것 같은데. 그리고 모호한 가치관의 나열보다는 실제 에피소드를 통해 차별성을 보여주는 게 더 인상적일 것 같고.
눈에 보이는 대로 얘기를 했더니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밑에 있던 파일을 빼서 펼쳤다. 이것도 좀 봐주세요. 자기소개서였다. 그건 고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녀가 여태 쌓아 온 공인자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들을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녀의 손끝에서 간절함과 절박함이 묻어났다. 해외연수와 인턴 경력, 공모전 수상 등 화려하기 그지없는 자기소개서였지만 그 다채로운 내용에서 요즘 학생들이 이고 진 삶의 무게가 느껴져 오히려 안쓰러웠고 만점에 가까운 토익점수를 보니 비슷한 또래인 아들의 점수가 떠올라 약간 우울해졌다.
이걸 당장 제출하는 건 아니고 수정하고 더 보완할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눈빛이 아직은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어린 새를 닮았지만 동시에 제 몫의 삶을 어떻게든 제대로 꽃피워 보고싶다는 열정도 가득했다. 환승역에서 내린 그녀가 창 밖에서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살짝 흔들었고 그 뒷모습은 이내 지워졌다.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뜬금없이 첨삭지도를 하는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밤샘 작업을 했다는 후배 소설가에게 “젊음이 좋구나. 밤샘을 하고도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하다니”했더니 정색을 하며 항의를 했다. “그거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입니다. 청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요.”
지난 세기의 젊은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는 세대처럼 보이지만 이들 역시 삶이라는 엄정한 채권자에게 젊음의 빛나는 조각들을 지폐처럼 잘라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이와 어른이 뒤섞여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른들이 그녀 세대들에게 품고 있는 어떤 편견이란 대부분 ‘노인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직업 탓인지 지하철을 타면 제각각 다른 표정과 옷차림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개별적인 삶을 상상해보거나 뭘 하는 사람일까 추리해보기도 한다. 특이한 상황을 목격하기라도 하면 이걸 어떻게 소설 속에서 써먹어볼까 머리를 굴리기도 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읽는 책이나 신문을 몰래 훔쳐보는 이상한 버릇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로 자꾸 눈길이 갔다. 대학생인 듯한 그녀는 출력한 문서를 무릎에 올려놓고 머리를 수그린 채 푸른색 펜으로 첨삭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고뇌와 몰입의 강도가, 원고를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열 번째 퇴고를 하고 있는 소설가의 그것과 비슷해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별표와 밑줄로 장식해놓은 단어들이 제발 날 좀 봐달라고 간절히 외쳤기 때문일까. 훔쳐본 바 문서의 내용은 어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지원서이거나 면접을 대비한 예상질문과 답변서처럼 보였다. 자신의 장점과 남다른 소질이 센 단어들로 표현돼 있었다. 가자미눈을 하고 그것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나는 이윽고 그녀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학생. 있잖아.
화들짝 놀라기라도 했는지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았다. 어린 사람들이 모두 예뻐보이는 건 나이가 든다는 표시일까. 나는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만큼 사회성이 풍부한 사람이 못된다. 이 오지랖이 나의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기왕 불렀으니 몇 가지 의견을 들려주었다. 물론 소곤소곤.
학생. 내가 회사 입장이라면 지원자 스스로 창의성과 재능과 열정이 있다고 무작정 주장해놓은 지원서보다는, 구체적인 과업을 들어 학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는 게 더 호감을 줄 것 같은데. 그리고 모호한 가치관의 나열보다는 실제 에피소드를 통해 차별성을 보여주는 게 더 인상적일 것 같고.
눈에 보이는 대로 얘기를 했더니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밑에 있던 파일을 빼서 펼쳤다. 이것도 좀 봐주세요. 자기소개서였다. 그건 고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녀가 여태 쌓아 온 공인자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들을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녀의 손끝에서 간절함과 절박함이 묻어났다. 해외연수와 인턴 경력, 공모전 수상 등 화려하기 그지없는 자기소개서였지만 그 다채로운 내용에서 요즘 학생들이 이고 진 삶의 무게가 느껴져 오히려 안쓰러웠고 만점에 가까운 토익점수를 보니 비슷한 또래인 아들의 점수가 떠올라 약간 우울해졌다.
이걸 당장 제출하는 건 아니고 수정하고 더 보완할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눈빛이 아직은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어린 새를 닮았지만 동시에 제 몫의 삶을 어떻게든 제대로 꽃피워 보고싶다는 열정도 가득했다. 환승역에서 내린 그녀가 창 밖에서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살짝 흔들었고 그 뒷모습은 이내 지워졌다.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뜬금없이 첨삭지도를 하는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밤샘 작업을 했다는 후배 소설가에게 “젊음이 좋구나. 밤샘을 하고도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하다니”했더니 정색을 하며 항의를 했다. “그거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입니다. 청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요.”
지난 세기의 젊은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는 세대처럼 보이지만 이들 역시 삶이라는 엄정한 채권자에게 젊음의 빛나는 조각들을 지폐처럼 잘라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이와 어른이 뒤섞여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른들이 그녀 세대들에게 품고 있는 어떤 편견이란 대부분 ‘노인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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