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은행의 비밀주의는 뿌리가 꽤 깊다. 16세기 종교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건너온 위그노(칼뱅파 신교도)들이 귀족의 예금을 비밀리에 관리한 게 시초다. 1870년 독불전쟁 때 ‘박해받는 자의 재산을 지켜주겠다’며 은행들이 비밀계좌를 열기 시작했다. 비밀주의가 합법화된 것은 1934년이다. 은행법을 전면 개정, 비밀준수를 법에 의한 의무로 만들었다. 나치가 유대인 예금주 명단을 공개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법을 동원해 역공을 편 것이다. 중립국으로서의 가치보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국가재정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은행업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10만스위스프랑(1억1800만원) 이상이면 누구나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스위스는 동시에 ‘뒤가 구린 돈’의 더없는 안식처가 됐다. 독재자들이 쫓겨날 때마다 스위스 비자금설이 따라붙었다. 자이레(지금의 콩고)의 모부투가 70억달러, 파나마의 노리에가가 3억달러… 이런 식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유학 중이던 딸 노소영 씨에게 건넨 20만달러가 스위스은행에서 인출된 것이라 해 구설수에 시달렸다.
하지만 스위스 은행도 이젠 검은 돈의 완벽한 은닉처가 아니다. 테러와 범죄에 쓰이는 자금을 지켜준다는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2008년 UBS는 탈세혐의 고객 4400여명의 정보를 미국에 넘겼다. 독일과 영국 등도 자국민 계좌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협정을 맺었다. 물론 스위스은행연합회 등에선 비밀주의를 지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국제적 압력이 거세지고 있어 비밀주의 고수는 사실상 물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탈세혐의자의 계좌정보를 공개하도록 한국과 스위스 정부가 맺은 조세협정이 지난달 25일 발효됐다. 이 때문인지 국세청이 해외계좌 개설신고를 받은 결과 5명이 스위스에 돈을 맡겼다고 밝혔다. 금액은 1003억원이다. 작년엔 두 명이 73억원을 예치했다고 신고했었다. 스위스은행에 돈을 맡겨도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스위스 은행이 아니다. 돈을 쌓아놓을 장소를 찾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 다시 밭에 묻어야 하나?
<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 >